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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위기에 대해 ‘이게 다 복지 때문이다’라거나 ‘그리스 시민들이 너무 게을러서 그렇다’는 진단도 있었습니다만, 정말 그럴까요?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통해 이러한 진단에 대해 하나 하나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위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이며, 그리스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그리스 위기의 진짜 원인은?

이종태 : 그리스 같은 남유럽 시민들이 너무 게을러서 경제 위기를 자초했다는 말도 있는데, 그건 어떻습니까?

장하준 :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는 그런 말할 자격이 없어요. 그리스는 국민소득이 2009년 기준 2만 8000달러로 당시 2만 달러가 채 되지 않던 우리나라보다 더 높았어요. 이게 뭘 말합니까? 그리스 인들이 우리보다 노동 시간은 더 짧아도 노동 생산성은 그만큼 더 높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존경해야죠. 일을 오래 한다고 반드시 좋은 건 절대 아닙니다. (중략)

제가 저번에 『가디언』에 ‘18세기 이데올로기 때문에 세계 경제가 붕괴한다’는 칼럼을 썼어요. 검약하고 검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가 망했다는 사고 자체가 18세기 이데올로기입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은 검약하지 않은 자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라고 청교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너무 놀고 낭비했거나 아니면 남을 속이기 좋아해서 가난해진 거라고 믿은 거죠. 이렇게 가난을 윤리 문제로 환원시키다 보니 금융 위기가 벌어져도 그 원인을 윤리적 결함에서 찾아요. 시스템적 위기(systemic crisis)라는 개념은 나올 수가 없는 거죠. (하략)

정승일 : 그리스가 다른 유로존 회원국들에 비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EU 내에서의 자유 무역 때문이에요. 유럽 경제 통합의 기본 아이디어는 회원국들이 서로 무역 및 서비스 시장을 활짝 열면 EU와 유로존 전체에서 생산성이 골고루 발전해 공존공영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장하준 :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요. 한미 FTA 찬성론자들이 그렇게 말하곤 하거든요. 그게 바로 전형적인 자유 무역 이론이고 비교 우위 이론이에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아무리 법적으로 그리스에서 독일로 이민을 무제한 허용한다 해도 언어 장벽 등 한계가 많아 노동력이 실제로 자유롭게 움직이기는 어려우니까요.

정승일 : 그래서 EU 내에서의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실험이 실패한 증거가 바로 그리스의 위기라는 겁니다. EU 내에서 자유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비교 우위의 논리가 작동하자 독일이나 핀란드 같은 수출 제조업 강국들은 더욱 더 수출이 늘어나 무역 흑자도 많아지고 수출 제조업도 강해져요. 반면에 그리스나 포르투갈처럼 원래 제조업이 약했던 나라는 EU 내의 완전한 시장 개방으로 말미암아 제조업 발전의 길이 막히면서 농업이나 관광업, 해운업 같은 것에 특화되고요. (중략) 불균형이 심하다 보니 그리스 같은 나라들에 매년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된 겁니다.

(중략)

게다가 그런 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든 잘못은 그리스의 내재적 결함 때문이라고 몰아가는 국제 금융 자본들, 특히 이번 경우 독일과 프랑스의 은행들은 그리스 위기가 발생하기 전부터 그리스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독일이나 프랑스 은행들이 과연 그리스 정부에, 그리스 복지 시스템에 그와 비슷한 결함이 많다는 걸 전혀 모르고 돈을 빌려 줬을까요?

장하준 : 그럼요. 게다가 정말로 몰랐다면 그게 더 문제죠. 첨단 금융 기법을 자랑하는 선진국 은행들이 채무자의 결함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돈을 빌려 줬단 말입니까? 그건 거의 직무 유기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고 기를 쓰는 건 다 자기네 채권은 한 푼도 탕감당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르헨티나에 ‘탱고를 추려면 둘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어요. 누가 잘못 빌렸다면 분명 잘못 빌려 준 사람도 있는 겁니다.

이종태 : 그리스 경제가 현재로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군요. 그래서인지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거 같습니다.

 파산을 선언한 아르헨티나의 반전

장하준 :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죠. 그와 유사하게 행동했던 아르헨티나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죠. 아르헨티나도 20년 전 지금의 그리스처럼 통화 주권이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자국 통화인 페소화와 미국 달러화를 일대일로 연동시키는 동시에 통화 발권량을 달러 보유고에 묶었기 때문이죠. 그 이래 아르헨티나 정부는 달러화에 대한 페소화 가치를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 재정 긴축을 시행합니다.

그렇게 되니 아르헨티나 통화의 화폐 가치가 안정되어 좋기는 한데, 문제는 미국 달러가 고평가되면서 아르헨티나 페소도 같이 고평가되어 수출이 늘지 않고 무역 적자가 쌓였다는 거예요. 결국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말부터 경제 위기에 빠집니다.

아르헨티나는 처음에 지금의 그리스처럼 긴축 정책을 써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가 결국 경제가 파탄이 나요. 그러자 2002년에 집권한 새 정부가 과감하게 디폴트, 즉 국가 파산을 선언하고 페소화-달러화 연동을 끊어 버립니다. 말하자면 그리스가 유로화에서 탈퇴하는 것에 해당하는 일을 벌인 거죠.

그러고는 현재의 그리스와 달리 복지와 재정 지출을 늘리면서 경기 부양을 추진하자 아르헨티나 바깥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안 그래도 기울어 가는 나라, 이젠 완전히 망했다고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비판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그 정책을 시행한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무려 7.5퍼센트에 달했는데, 이는 남미에서 1등인 건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높은 수치예요. 이 기간에 경제 성장률이 4퍼센트대이던 우리보다도 훨씬 높고요.

물론 아르헨티나가 수출하는 콩 같은 농산물의 국제 가격이 최근 크게 오른 것도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구제 금융 조건을 받아들여 축소 지향적 균형 회복으로 가지 않고 정부 지출을 통한 ‘확대 지향적’ 균형 회복으로 간 덕분이라고 봐야 해요. 그리스도 정 안 되면 아르헨티나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제가 그리스 언론과 인터뷰했을 때 ‘당신들이 정말로 유로존에 남고 싶다면 탈퇴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말하자면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정 안 되면 나도 아르헨티나처럼 탈퇴할 수도 있다며 EU를 압박하며 협상해야지, 지금처럼 제발 EU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면 아무런 양보도 얻지 못한다는 거죠. 아무튼 EU는 그리스가 재정 긴축을 하지 않으면 구제 금융을 주지 않겠다는 건데, 이건 소방수가 불 끄러 와서는 집주인에게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물을 뿌리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거나 다를 바 없어요.

-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본문 중 발췌 재편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저자
장하준, 이종태, 정승일 지음
출판사
부키 | 2012-03-2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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