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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일하다보면 설, 추석마다 살짝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형제 자매 사촌들과 비교되기 때문이지요. 대기업에서 제공하는 복리후생은 출판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잖아요. 하다못해 '등록금 천만 원 시대'라고 해도 큰 걱정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녀 학자금 지원을 해주는 곳이 많으니까요. 대학생들이 스펙에 스펙을 쌓으며 기를 쓰고 대기업에 입사하려는 이유도 이해합니다. 단순히 연봉으로만 계산되지 않는 유무형의 지원이 있으니 말이지요.

대기업이 구조조정을 할 때 노동자들이 생존권 보장을 걸고 격렬히 저항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단순히 일자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약속되었던 모든 복리후생, 그러니까 유무형의 복지를 모두 잃게 되는 셈이니까요.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의 기업형 복지만 있었던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더욱 기를 쓰고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애쓰거나, 고급 자격증이 필요한 전문직이 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현실 앞에선 창의성의 발현이라거나 자신의 자질과 소질을 고려해야 한다는 직업 선택의 주의점 따위 그야말로 '교과서'에나 있는 이야기지요.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통해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복지는 단순히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고도화 시대,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왜 그런 걸까요? 이 부분 일부 소개해드립니다. <편집자 주>

 

산업 고도화 시대, 경제 발전을 이루려면

 

이종태 : 지난번 무상 급식 논쟁 때 공짜 밥을 주면 아이들이 게을러지고 자활 의식이 없어지므로 나중에 고난을 이기기 힘들 뿐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지도 잃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장하준 :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과연 자기 자식을 굶기나요? 굶어 봐야 자활 의식이 생긴다면서요? 아주 저열하고 낡은 논리입니다. ‘복지는 나라에도 좋지 않고 개인에게도 나쁜 거다,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든다, 사람은 무릇 배를 곯고 가난을 알아야 일하는 존재다,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한 푼도 공짜로 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복지 혜택을 베푼다 해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줘야 한다’는 18세기 유럽의 복지관 그대로니까요.

 

정승일 : 저는 오히려 복지 안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경제 성장을 원한다면 복지국가를 해야 한다는 거죠. 전경련 사람들도 앞으로 우리나라 산업이 계속 고도화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겁니다. 그런데 산업 고도화가 뭡니까? 낡고 수익성 낮은 산업에서 새롭고 수익성 높으며 첨단 기술이 활용되는 산업으로 자금과 인력이 옮겨 가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끊임없는 구조 조정이 필요한데, 이게 복지 제도 없이 가능할까요? 한진중공업 사례에서 봤듯이 노동자들 처지에서는 구조 조정에 격렬히 저항할 수밖에 없어요. ‘정리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한국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현재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걸 기업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러니 일자리를 잃으면 삶 자체가 무너집니다. (중략) 기업체에 정규직으로 취업해 퇴직 때까지 일해야 그나마 그럭저럭 생활을 꾸리지, 거기서 잘리면 그 순간 모든 걸 잃게 되는 상황인 거죠. 이런 조건에서는 노동자들이 구조 조정을 죽자 사자 반대할 수밖에 없어요.

장하준 : 미국에서 기업이 구조 조정을 하기가 스웨덴이나 핀란드보다 훨씬 더 힘든 것도 바로 그래서예요. 더욱이 미국에서는 국민건강보험이 대단히 부실하기 때문에 괜찮은 직장에 취업한 사람들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잘리면 병원도 못 가는 거죠. 그러니 미국 노동자들도 목숨 걸고 구조 조정을 반대할 수밖에요. 우리나라와 상황이 똑같아요.

정승일 : 진정으로 한국 경제의 성장과 산업 고도화를 바란다면 노동자들의 삶을 공적으로 보장하는 장치, 즉 복지국가가 필요한 겁니다. 실직해도 큰 문제없이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수준의 실업수당은 기본이고, 더 중요하게는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양 산업에서 방출되는 실직자들이 새롭게 고도화된 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전직 훈련도 제공되어야 하고요. 그 비용도 실직자 본인은 감당하기 힘드니만큼 복지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재취업 교육을 시켜서 다른 회사나 산업으로 이어 주는 거죠. 이런 게 바로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입니다.

장하준 :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현대 경제는 복지국가를 더욱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과거에는 직종을 바꿀 경우 그저 몇 주 정도의 전직 훈련만 받으면 적응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은 산업이 기술적으로 상당히 고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직종을 바꾸는 경우 상당 기간 재교육이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그에 따른 부담을 실직자가 감당할 여력이 있을까요? 이 부분에 국가적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가 경제 전체의 산업 고도화가 아주 힘들어지는 거죠. 간단히 말해 우리가 말하는 복지는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먹고살 만큼 파이가 충분히 만들어졌으니, 이제부터는 그 파이를 모두 나눠 먹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복지국가는 그렇게 한갓 분배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종태 : 앞에서 제가 신자유주의는 자본과 노동을 조직하는 하나의 생산 시스템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복지국가 역시 하나의 대안적인 생산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정승일 : 물론 복지에는 분배의 측면도 강합니다. 문제는 그것만 하자고 할 경우예요. 예컨대 미국이나 영국에서 발전한 복지 제도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과 소비를 보완해 주는 데 집중해요. 국가 재정으로 소득을 재분배해 소비를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케인스주의 경제학에 입각한 정책이죠. 이런 나라들도 기업에서 퇴출된 노동자에게 어느 정도의 실업수당은 줍니다. 그렇지만 산업 고도화를 위한 직업 재교육 같은 건 별로 없어요 .반면에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실업수당을 넉넉하게 주는 건 물론 정부가 돈을 대서 이직이나 전직을 위한 재교육도 시켜 줌으로써 산업 고도화와 경제 성장이 더 잘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복지국가가 실직자와 그 가족만 돕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기업과 자본도 돕는 셈이죠. 미국과 영국처럼 복지국가가 소득과 소비의 재분배에만 집중한다면 경제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장하준 : 다른 예로 노동자가 타 도시에 직장을 구하면 이사를 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스웨덴에서는 정부가 주택 구입 비용을 빌려 줍니다. 그 대출금은 나중에 살던 집이 팔렸을 때 갚으면 되는 거죠. 또 스웨덴은 탁아나 보육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복지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스웨덴 여성들이 마음 놓고 직장에 나가 일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고요. 과거와 달리 현대 여성들은 교육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여성들이 노동 시장에 들어가 제대로 일할 수 있다면 기업들에도 좋은 일 아닌가요? 이렇듯 복지국가는 경제 효율성 증대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승일 : 덴마크나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신자유주의 성향이 농후한 다보스 포럼에서 조사하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 설문 조사에서 매년 1~5등을 차지하는 게 우연이 아니에요. 복지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겁니다.

이종태 : 그런데 복지라는 말만 나오면 ‘왜 생산은 않고 분배만 하려 드느냐’고 따지는 분들이 이른바 보수 쪽에는 꼭 있어요. 복지라는 것에 이렇게 생산적 측면이 강한데도요.

장하준 :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미국식 복지밖에 모르기 때문이에요. 미국 같은 나라의 복지는 시장에서 탈락되어 빈곤의 늪에 빠진 사람들만 골라 겨우 밥 굶지 않을 정도의 혜택을 제공하는 시스템이거든요. 이른바 ‘잔여적 복지’라고 하죠. 이런 미국식 복지는 생산 그 자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야말로 생산은 않고 분배만 하는 거죠.

정승일 : 반면에 우리가 말하는 건 복지와 생산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선순환을 하는 ‘생산적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복지를 하는 나라는 북유럽, 독일 같은 나라들이에요. 여기서는 미국, 영국처럼 일자리 찾기도 힘든 극빈자들만 복지 혜택을 받는 게 아닙니다. 버젓이 직장을 가진 현장 노동자는 물론이고 사무직 중산층에서 의사,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지 혜택을 받아요. 이런 걸 ‘보편적 복지’라고 하는데, 미국식 잔여적 복지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이 아주 왜곡된 채 받아들여졌어요.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회복지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1997년 말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고 나서였어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빈곤층으로 전락하자 김대중 정부가 2000년 10월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합니다. 절대 빈곤층이 최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1인 가구에 32만원, 2인 가구 54만 원 등의 기초 생계비를 지원하는 잔여적 복지였어요. 우리가 말하는 유럽식 복지와는 다른 미국식 복지를 한 거죠. 그런데도 김대중 정부는 그걸 생산적 복지라고 불렀습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는 훨씬 더 심했던, 사회복지는 ‘빨갱이’ 정책이라며 이념 논쟁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그런 비난을 피하려고 미국식 복지인데도 일부러 ‘생산적’이란 용어를 붙인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용어상 오해를 낳고 있고요.

장하준 : 저는 복지가 반(反)경제적이고, 반(反)생산적이라고 말하는 분들께 여쭤 보고 싶은 게 많아요. 만약 그렇게 복지가 나쁘다면 스웨덴과 핀란드의 경제 성장률이 제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죠? 스웨덴과 핀란드는 국민소득 전체에서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의 2배 반이나 되는 나라들인데 말입니다.

정승일 : 더욱이 지금 같은 글로벌 금융 위기 시대에 유럽에서 복지 지출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그리스는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복지가 가장 발달한 스웨덴은 성장률이 3퍼센트 내외에 이르고 있어요. 선진국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죠.

이종태 : 반(反)복지파들은 그런 문제에도 명확한 답을 내놓던데요. 스웨덴은 우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라고요.

장하준 : 제가 복지 문제를 제대로 연구해 보기 전에 자칭 우파라는 스웨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비장한 어조로 ‘지금 스웨덴의 조세 부담률은 50퍼센트나 된다. 너무 높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결론이 예상밖이었어요. ‘그래서 45퍼세트 수준으로 내려야 한다!’는 거예요. 이런 스웨덴 우파를 한국에 데려오면 보수 세력은 아마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을까요.

 

-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본문 중에서 일부 발췌, 재편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저자
장하준, 이종태, 정승일 지음
출판사
부키 | 2012-03-2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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