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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영이 본 캄보디아의 맨얼굴 - <사바이 인도차이나>
덜 완벽하지만 그만큼 더 행복한 캄보디아
전기가 세 시간밖에 들어오지 않는 태국 씨판돈의 마법같은 붉은 노을에 반해 하루 더 머물렀던 여행작가 정숙영이 다시 길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캄보디아의 라따나끼리. 무대책 여행작가 정숙영씨는 빠이에서 만난 H군에게 주워들은 “여행자들이 별로 가지 않는 오지마을이며, 아주 괜찮은 방갈로가 있어 틀어박히기 좋다는” 정보 하나 달랑 들고 라따나끼리로 갑니다. 태국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 출국세, 비자 추가비, 입국세 등 예상치 못한 비용과 현지 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간 여행사가 바가지를 씌우고 다른 여행자들과 묶어서 프놈펜이나 씨엠립으로 보내려 하는 여행사에 울분을 토하기도 합니다. 이 곳을 지나는 많은 여행자가 겪는 일을 정숙영씨 역시 겪으며 여행자들과 동지애가 생기고, 조금 날씬해진 욕망 덕분에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도 갑니다. 동남아 남부바다를 보기 전 씨엠립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잠시 머물며 앙코르와트도 가지요. 준비 없이 유적지를 돌아볼 때의 느낌, 무대책 무규칙 좌충우돌 정숙영씨가 먼저 겪었습니다.
<사바이 인도차이나>에는 캄보디아 외에도 태국, 라오스, 베트남의 생생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사진의 저작권은 <사바이 인도차이나>저자 정숙영 씨에게 있습니다. 무단 도용하시면 안 됩니다. 스크랩시 반드시 본문 전체 스크랩으로 해 주시고, 별도로 사진을 사용하지 마세요.
캄보디아 국경을 힘겹게 건넌 동지의 마음
독일인 부부는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다 죽어가는 꼴이냐고 물었다.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며 영어도 짧고 몸도 힘들어서 대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하나 찬찬히 인터뷰하듯 내게 물었다.
“자, 어디서 왔어요?”
“오늘 아침 라오스에서 출발했어요. 씨판돈에서요.”
“아, 우리도 그 루트로 왔어요. 국경에서 미니버스 탔어요?”
“네.”
“그리고 스툰 트랭으로 왔고요?”
“네. 맞아요. 저는 여행자 버스를 탄다고 알고 있었는데…”
“로컬 버스 태우던가요?”
“네. 그쪽도요?”
“예. 그리고 그 버스는 가로등도 없는 진창길을 달리다가…”
“몇 번 고장 났어요?”
“세 번요. 그쪽은요?”
“우리는 열 번요.”
아아. 이 든든함이란. 그 험난한 길을 밟아온 여행자들에게 국경 따위란 땅따먹기 금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 부부는 마치 나를 가출했다 십 년 만에 돌아온 딸만큼이나 반가워해 주었다. 국적도 인종도 달랐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순간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수다의 배경음악으로 필 콜린스의 <Another day in paradise>가 잔잔히 깔렸다. 그 순간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하루 동안의 고생을 보상받는 듯한 순간. -263쪽
행복의 정체는 날씬해진 욕망
밤이 되고, 식당으로 올라가 나는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고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나는 도대체 이 행복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사실 이곳의 환경이 대단히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물에서는 냄새가 나고, 뜨거운 물 샤워도 안 되고, 날씨는 더럽고, 개미도 많고, 친구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다. 라따나끼리의 마력인가? 아닌 것 같다. 사실 빠이에서도 이만큼은 행복했다. 단지 빠이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이곳은 덜 완벽하다는 것. 덜 완벽하지만, 그만큼 행복한 것이 내가 느끼는 당혹감의 실체였다.
아마도 방비엥과 씨판돈을 거치며 내 욕망은 어느 정도 다이어트를 한 모양이다. 무선 인터넷도 없고, ATM도 없고, 전기도 없고, 더운물 샤워는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을 계속 거치며, 그런 것을 특별히 바라거나 꼭 필요하지 않아도 된 상태까지 온 것이다. 그렇게 욕망의 크기가 날씬해진 상태가 된 거다. 아니 몸이나 날씬해지지 왜 엉뚱한 욕망이…
라따나끼리의 밤은 천천히 깊어갔다. 나는 벌레들과 사투를 벌이며 조용히 한 자 한 자 일기를 적어나갔다. 벌레 한 마리가 일기장에 툭 떨어져 내렸다. 지체 없이 페이지를 덮어버릴까 하다, 잠시 멈칫했다. 벌레의 꼬리에서 노오란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반딧불이었다. 나는 서울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벌레의 궤적을 한참이나 홀린 듯 좇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벌레의 불빛으로 공부했다는 옛날 고사는, 100퍼센트 뻥이다. - 274쪽
거짓말처럼 매끄러운 동그라미를 그리는 라따나끼리의 호수
아주 동그랬다. 천지도, 백록담도 본 적이 없으니 분화호는 내 생전 이것이 처음인 듯하다. 거짓말처럼 매끄러운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호수 물속에는 동네 꼬마들이 신나게 다이빙을 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숙소 사람들이 그랬다. 수영해도 된다고. 입장료씩이나 받는 유명 관광지에서 동네 아이들은 헤엄을 친다. 그 풍경이 사뭇 낯설면서 마음에 든다.
혹시 그럼 내 몸도 씻어도 되는 걸까. 근처에 경비원 비슷한 아저씨가 있어서 여기서 씻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괜찮단다. 나는 조심스럽게 호수에 손과 발과 얼굴을 씻었다. 날씨가 흐려서 잘 몰랐는데, 물이 정말 맑다.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호수를 빙 둘러싸고 울창한 열대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날이 흐린데도 물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맑은 공기 위로 축축한 밀림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고 쑥스럽게 웃음을 지어 주었다. -287쪽
씨엠립, 앙코르와트
주인장은 내가 백지도 아닌 백치 상태의 바보 여행자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채고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씨엠립에는 앙코르와트 하나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시대의 유적인 ‘앙코르 유적군’ 중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고, 그 외에도 앙코르 톰이니 따 프롬이니 하는 수많은 유적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유적에는 셔틀버스 따위는 전혀 없기 때문에 뚝뚝이나 자동차를 빌려서 이용해야 하는데 뚝뚝이 값이 싸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많이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 만만하게 거쳐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온 이곳은 사실 만만찮은 준비와 공부를 필요로 하는 여행지였던 거다.
주인장이 내일의 행선지를 묻자, 나와 동행은 급히 책을 뒤져 한 곳을 골랐다. 앙코르 톰. 처음 알았다. 어린 시절 나를 반하게 했던 그 사면상은 앙코르 와트가 아니라 앙코르 톰에 있는 것이었구나.
“앙코르 톰 가신다고요? 그럼 딱 한 번만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주인장은 그 자리에서 앙코르 톰의 역사와 관광 요령에 대해 방언이라도 터진 듯 단숨에 다다다 설명했다. 동행이 된 아가씨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언니, 다 기억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못하지. -382쪽
언니 예뻐요에서 아줌마 뚱뚱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서 바라이의 아이들
차는 이내 서 바라이에 도착했다. 저 앞으로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담고 있는 저수지가 보였다. 하늘과 저수지가 맞닿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이 내게 와락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와락 달려든 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아이들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벼락같이 아이들이 달려들었다. 열댓 명의 아이들은 모두 조잡한 팔찌를 한 바구니씩 들고 마치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주문 외우듯 나지막하고 중독성 있는 말투로 호객을 해댔다. 그것도, 한국말로.
“사장님 멋있어요, 1달라 다섯 개.”
“사모님 예뻐요, 1달라 다섯 개.”
“오빠 날씬해요, 1달라 여섯 개.”
아아. 누가 저 아이들에게 저 말을 가르친 걸까. 한인 봉사단체에서 설마 애들 앉혀놓고 ‘사장님 멋있어요.’를 가르치지는 않았을 텐데. 한국 앵벌이 조직이 여기에 진출한 것도 아닐 테고. 게다가 발음과 용법도 너무나 제대로 안다. 억양이 한결같이 ‘이번 정류장은 신도림, 신도림입니다.’라 그렇지, 얘들은 자기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모님 예뻐요.’라고 들러붙던 아이에게 싫은 내색을 했더니, 이내 ‘언니 예뻐요.’로 고쳐서 부른다. 그래도 살 기미를 안 보이자 ‘아줌마 뚱뚱해.’란다. 아아. 이런 천재 같으니. - 406 쪽
<정숙영 선생의 삽질에서 얻는 여행 팁>
1. 태국 씨엠립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는 예상치 못한 비용을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출국세, 비자비 추가비, 입국세까지...)
비자를 받은 뒤 입국 수속을 밟았다. 그러고서 그냥 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날다람쥐 같이 생긴 아저씨가 나를 붙들었다. 입국세 내란다. 아니 비자에서 3불이나 더 뜯어갔으면 됐지 입국세는 또 무슨 입국세야. 가이드북이니 친구들의 문자니 인터넷 검색에서도 캄보디아가 입국세 받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도 없구먼. 아, 들어본 적이 있다. 캄보디아 국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오만 이유를 다 갖다 붙인 바가지가 성행하고, 그 바가지 머니는 전부 공무원들 주머니로 들어간단다. 그래서 캄보디아 공무원 사이에서는 이처럼 공공연하게 횡령이 가능한 국경 공무원 자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나. 그들이 말하는 입국세는 1달러. 1달러?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다. 지금 내 전 재산이 얼마인줄 알아? 20바트야, 20바트! 700원이란 말이다!! - 242쪽
2. 앙코르와트에 가기 전, 돌덩이를 알아 볼 수 있는 공부도 필수!
오후에 앙코르와트까지 돌아본 후,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나는 당분간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파란 하늘이 있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이 돌이 무슨 돌인지 대충이라도 알기 전까지는, 나는 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흔적 앞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돌들이 내게 거는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유적에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씨엠립 체류는 조금 더 길어질 모양이었다. 적어도 방콕 가기 전에 겉핥기 구경만 하려던 마음가짐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으니까.
이 또한 일부분일 뿐, 더 많은 캄보디아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바이 인도차이나> 안에 가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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