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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영이 본 태국의 맨얼굴 - <사바이 인도차이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 같은 태국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여행지, 태국.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유여행을 계획해 떠나는 사람도 의외로 많은데요. <사바이 인도차이나>에는 패키지 상품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태국의 갖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을 여행하는 동안의 감동과 유쾌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도시를 거부한 예술가와 히피들이 만든 태국의 산골 마을 빠이, 이 곳은 여행자를 “늦잠 자고, 낮잠 자고, 일찍 잠들게 하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공기가 촉촉이 배어있습니다. 그 곳의 습기는 바쁜 도시생활에 지쳐 탈출한 여행자에게 감동과 위로를 건넵니다. <사바이 인도차이나>에는 태국 외에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의 생생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사진의 저작권은  <사바이 인도차이나> 저자 정숙영 씨에게 있습니다. 무단 도용하시면 안 됩니다. 스크랩시 반드시 본문 전체 스크랩으로 해 주시고, 별도로 사진을 사용하지 마세요.

 

 

 

 

부자 마을 통러의 퀼트 같은 풍경

 

통러는 수쿰빗의 55번째 쏘이다. 영어 표기로는 ‘Thonglor’. ‘통러’와 ‘통로’의 중간 발음쯤 되는데, ‘통로’라고 하면 쭉쭉 뻗은 복도만 생각나서 나는 굳이 ‘통러’라고 부르고 있다. 주로 영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거리로서, 고급스러운 주택과 아파트를 비롯해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 웨딩숍, 에스테틱 등이 많이 몰려 있는, 한마디로 ‘부촌’이다. … 통러라는 동네의 첫인상은 약간 놀랍기까지 했다. 내 선입관 속의 ‘태국’ 내지 ‘방콕’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쿄나 서울의 강남 어딘가를 뚝 떠다가 갖다 놓은 듯한 세련된 동네였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며칠을 머물고 나니, 다른 것이 보였다. 강남이나 도쿄 번화가 같은 데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통러에는 있었다. 잘나가는 동네들은 대개 깔끔, 세련, 화려, 반듯 등의 수식어가 규칙처럼 점령하고 있어 서민, 소박, 거칠, 가난 따위는 끼어들기 힘들다. 기껏 있어도 안 보이는 곳에 들어가 있거나, 온갖 세련되고 화려한 것들에게 비좁은 화해를 청하며 해 덜 드는 구석에 멋쩍게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통러는 안 그랬다. 무기질의 세련과 삶의 매캐한 땟국이 한 거리에서 멋지게 공존하고 있었다. 에어컨 잘 나올 듯한 근사한 레스토랑과 카페가 모여 있는 블록 바로 옆에는 파리와 전투를 벌이며 밥 먹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노천 식당가가 이어지고, 그다음 블록에 화려한 웨딩숍이 이어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허름한 동네 밥집과 건물들이 이어진다. 청담동 카페 골목과 남대문 먹자골목을 한 조각씩 이어 붙여 퀼트를 만든 것 같은 거리다. 처음 갔을 때는 혹시 재개발이 덜 되어 이런 모습인가 싶었는데, 2년여 만에 다시 돌아와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달라진 것 거의 없이 여전히, 적도랑 남극만큼이나 다른 두 모습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걸 보면. - 30 쪽

 

 

 

  - 말쑥한 카페와 쓰레기를 높이 쌓은 리어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통러 거리

 

어떻게 저런 묘한 조화가 가능한 걸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런 얘기를 들은 바 있다. 태국은 빈부격차가 엄청난 나라란다. 태국의 진짜 부자들은 웬만한 한국 부자들이 명함도 내밀 수 없을 만큼 돈이 많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Z언니의 아파트에서 나와 큰길로 나가던 중, 높은 담장 둘러싸인 건물을 하나 봤다. 정면에는 고압적인 철 대문이 있었고, 담장과 철 대문 안에는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그리고 건물과 철 대문 사이에는 분수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Z언니에게 저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언니는 아주 덤덤하게 대답했다. “부잣집.”

도대체 가정집 앞마당에 분수를 왜 놓는 건지 그 심리는 잘 이해를 못하겠다만, 어쨌든 이런 얘기는 성립할 것 같다. 태국 1인당 GDP가 4천 달러가 채 안 되는데 집에서 분수를 틀어재끼는 부자가 있다는 건 그 수도료 낼 돈으로 온 가족이 한 달을 사는 집도 있을 거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가난한 사람이 부자들에게 품는 감정은 보통 두 종류다. 동경 또는 증오.

 

그런데 태국은 아니란다. 태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국교인 불교의 영향이란다. 현세에 자기가 못사는 것은 다 전생의 업이고, 저 사람이 잘사는 것도 다 전생의 덕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굳이 미워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속 태울 거 없이 공덕 열심히 쌓아서 내세에 자기도 부자로 태어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다. 이 마인드는 거꾸로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세에 자기가 아무리 부자라도 내세에는 얼마든지 비참한 신세가 될 수 있으므로 현세에 부지런히 덕을 쌓아둬야 하는 거다. 그래서 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되도록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저들에게 혹독하게 대했다가는 못된 업을 쌓게 되어 내세에 나쁜 생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미관이나 땅값 따위 때문에 서민의 삶을 함부로 뒤집어엎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삶을 위해 부자들이 자신의 공간을 기꺼이 양보하는 일도 흔하단다. 통러의 그 퀼트 같은 풍경의 심정적 근거는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보기 싫지 않다. 유리알처럼 온통 매끈하기만 한 다른 나라의 부촌이나 번화가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 34쪽

 

 통러 거리의 동자승

 


 

예술가와 히피의 기운이 가득한 곳, 태국 빠이 Pai

 

언니, 여기는요,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나는 동의의 표시로 씨익 웃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밤이 꽤 늦었다. ‘오늘보다 더 좋을 것만 같은 내일’을 빨리 맞으려면 자는 게 최고일 텐데,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방콕에서 빠이까지 꼬박 스물네 시간. 네 시간 가까이를 산길에 시달리고, 잠을 이틀 밤 설쳤다. 그럼에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이 불면의 이유는 단순했다. 자기 아까워서. 왠지 그냥 자버리기엔, 이 고즈넉한 열대 산속의 첫날밤이 주는 생경함과 달콤함이 너무도 아까워서.

 

나흘 정도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M양의 첫날 짐작은 100퍼센트 들어맞았다. 빠이는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좋아지는 곳이었다. 하루 두어 번 빠이의 골목골목을 느릿느릿 거닐며, 왜 사진 속의 빠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인공적인 표현수단으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으니까. 이 마을 구석구석에 골고루 잘도 배어 있는 특별한 에너지, 그것이 빠이의 매력이었다. 사람 팔다리에서 기운을 쪽 빼는 듯한, 그 느긋하고 나른하면서도 기분 좋은 에너지. 첫날 방문했던 그 레게 바 같은 한적한 흥겨움. 그런 에너지가 주는 매력을 가장 잘 느끼는 방법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한가로움, 이런 느긋함, 이런 게으른 평화를 도대체 뭐라고 하면 좋을까. - 84쪽


  

 - 게으르고 독특한 감성이 지나쳐 사람 놀라게 만든 말 탄 아저씨와 빠이 마을 풍경

 

  

 

내 행복의 최소 공약수

 

저녁 낙조 무렵의 산책은 변함없는 일과 중 하나였다. 붉은 노을의 기운이 번지기가 무섭게 나는 일을 접고 바닷가로 나갔다. 아오낭 비치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람부탄처럼 붉고 헝클어진 해가 저 바다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나는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제와 똑같은 바닷가지만, 어제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의 웃음, 연인의 발걸음, 모래 위에 새겨진 누군가의 사연, 바다 위를 나는 새.

한숨이 나왔다. 너무도 벅차고 행복해서, 기나긴 한숨이 웃음처럼 새어나왔다. 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는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는, 지금 저 바다를 앞에 두고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지난 여행의 기억들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이번 여행 중에는 비 오는 날이 더 많았다. 밖에 나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흔했다. 하지만 지금 내 기억 속에는 머물렀던 모든 곳이 한없이 푸른 하늘과 따스한 공기로만 남아 있다. 희한한 일이다. - 437쪽

 

- 아오낭의 에메랄드빛 바닷가에서 노는 원숭이

 

  

 

 

 <정숙영 선생의 삽질에서 얻는 여행 팁>

 

1. 현지에 도착해서 사용할 교통비는 가능한 작은 지폐로 준비하기!

나는 어떻게든 작은 바가지를 써보고자 소심한 발악을 했다. 달러로 내면 얼마냐고 물으니 택시기사는 냉큼 금액을 얘기했다. 30달러란다. 기사는 300바트와 30달러가 세임세임이라고 주장했지만, 300바트는 만 원이고 30달러는 3만 원이 훨씬 넘는다. 흥정을 해보려 했지만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놈의 의지는 시트가죽보다 질기고 헤드라이트보다 밝으며 미터기보다 명확해보였다. 결국 나는 상큼하게 달라는 대로 다 뜯기고 말았다. - 27쪽

 

2. 통러에는 횡단보도가 없다? 길 건너기에 적응하기!

일단 길 건너기. 이 도시에는 횡단보도라는 것이 거의 유명무실하다. 아예 통러 거리에는 횡단보도가 없다시피 하다. 머리 위에 횡단보도 표시 비슷한 게 있긴 한데, 사람이든 차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사람이 건너든 말든 차들은 그냥 제가 밟아왔던 속도를 줄이는 법이 별로 없고, 사람들은 그 달리는 쇳말 사이를 요령 좋게 지나간다. 아직 그 요령을 모르는 나는 길 한 번 건너는 데 몇 분가량의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고 만다. … 어딘가 책에서 읽었는데, 방콕은 ‘즐거운 지옥’이란다. - 42쪽

 

 

이 또한  일부분일 뿐, 더 많은 태국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바이 인도차이나> 안에 가득하답니다. 

 


사바이 인도차이나

저자
정숙영 지음
출판사
부키 | 2011-04-15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글쟁이의 여름 낭만? 좌충우돌 생계형 배낭여행![노플랜 사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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