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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이 당신의 뒤통수를 노린다
초대형 교회는 어떻게 ‘긍정주의’를 이용하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쓴 <긍정의 배신>(원제 Bright sided)는 자본주의와 철저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긍정 이데올로기를 현실과 역사, 그 양산자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분석하고 파헤친 수작입니다. 출간 직후 단박에 미국 아마존 사회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독자들 사이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요.
‘긍정주의’는 금욕과 절제의 사회 분위기에 반대한 미국의 신사상 운동에서 태동하여 신복음주의 교회 및 기업계와 결합하면서 발전했습니다. 구조 조정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업이 선호하는 강력한 동기 유발 산업을 낳았고 ‘긍정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지식 형태로 학계에까지 침투했지요.
긍정적 사고의 세력권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 우선 영어권에, 이어 중국, 한국, 인도와 같은 성장 국가들로 확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긍정주의가 위기의 징후에 눈감게 만들어 금융 위기를 비롯한 사회적 재앙에 대비하는 힘을 약화시켰다는 것이고, 더욱 가혹한 것은, 사회적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긍정성 부족으로 돌림으로써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신자유주의의 경제 통념을 비판하고,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회와 공동체의 철학적 가치관을 재검토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긍정의 배신>은 우리 시대의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사회문화적 신념 체계를 정면 겨냥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비판의 빈 공백을 채워 준다고 할 수 있지요.
<긍정의 배신>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신복음주의로 번창하는 초대형 교회들이 ‘하느님은 사람들이 번창하길 바라신다’고 설파하며 이를 시현하는 방법은 기도와 같은 고전적 수단이 아니라 긍정적 사고라고 비판합니다. 초대형 교회들의 모습은 점점 기업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미국의 경우 2001년부터 2006년 사이에만도 주간 예배 참석자 수가 2000명 이상인 초대형 교회의 수는 배로 증가해 1210개에 달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초대형 교회가 많잖아요.) 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또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초대형 교회의 '신복음주의'에 대해 2008년 타임지는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타임』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하느님 탓일까?’라는 도발적인 기사를 실었습니다. “하느님은 은행이 내 신용점수를 무시하도록 해 주시고 내가 처음으로 소유한 집을 축복해 주신다.”고 말하면서 일부 초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면을 꼬집은 것이지요.
<긍정의 배신>을 통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오스틴이 제시한 기법은 세속의 긍정적 사고 주창자들의 방법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바로 시각화다. 다른 긍정신학 주창자들 역시 언명을 강조하며,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신앙과 승리를 긍정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중략)
그렇다고 오스틴의 우주에 긴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망이 쉽게 실현되는 그의 세상 안에도 ‘적’은 잠복하고 있는데, 바로 부정적인 생각이다. “그 적은 당신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반면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신다. 적은 당신의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겠노라 하신다.”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목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로버트 슐러 또한 똑같은 ‘적’을 지목하면서 독자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절대로 말로 내뱉지 마라.”고 충고했다. 그런 감정에 언어라는 형태를 부여하면 적에게 꺾여 투항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p.181~182)
오스틴의 세계에서는 하느님마저 지지자의 역할을 할 뿐 필수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다. 신비와 경외감은 사라지고 없다. 하느님의 존재는 집사장 내지 개인적 조력자로 격하되었다. 하느님은 나의 속도위반 딱지를 해결해 주고, 식당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주고, 내가 책 계약을 딸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런 사소한 과업을 위해 하느님한테 기원하는 것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공손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p.189)
2007년 오스틴을 취재한 방송 〈60분〉에서 신학 교수인 마이클 호턴(Michael Horton) 목사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기독교의 강력한 주제인 죄, 고통, 구원을 빼 버린 오스틴의 세계관을 ‘솜사탕 복음’이라고 일축했다. 또 긍정신학의 핵심, 곧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개념도 이단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종교를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관한 것으로 만든다.”라고 말했다. (p. 190)
초대형 교회 건물은 기업 사무 건물이나 본사와 흡사하다. 목사는 성직자용 예복이 아니라 주로 정장 차림이다. 종교적 상징과 상은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핵심 철학에서 기업과 교회는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장애물을 극복하고, 긍정적 사고를 통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한다. 더구나 목사들은 으레 자유기업 체제와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에 찬동하기 때문에 기업과 교회의 유사성은 더욱 짙어진다. 슐러는 ‘불리한 조건’을 내세우거나 인종적 편견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을 계속 노력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지 말라고 경고했다. 오스틴은 “고용주들은 직원들이 신바람 나서 일하기를 원한다.”면서 신바람을 낼 만큼 급료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그런 태도로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일터에 주기를 바라신다. 열심을 내라. 본보기가 되라.”(p.204)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생활양식의 변화를 감수하고 사회복지 서비스를 수행하면서 지역민 속에 자리를 잡으려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죄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 곧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신도를 늘리는 데 아무리 관심이 많다고 해도 환생이나 다신론까지 유연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가형 목사들은 다르다. 이들은 전통적 교의가 과도하게 도발적이거나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내던진다. 교회의 시장조사 결과, 사람들은 죄에 관한 장광설을 듣고 어떤 식으로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주일에 고작 하루 직장이나 빨래 같은 잡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그런 귀중한 날의 한 시간을 지옥의 업화가 닥쳐오고 있다는 경고를 받는 데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초대형 교회와 그런 위치를 꿈꾸는 교회들에게는 요구가 많은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긍정적 사고였다. 긍정적 사고가 성서에 근거한 진실이거나 성서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객’을(일부 초대형 교회 목사들은 신도를 ‘고객’이라고 부른다)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p.197~198)
초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툭하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하는 것으로 미루어 예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세속의 경영 컨설턴트와 전문가들에게서도 지침을 구한다. 존 잭슨 목사는 『교회를 경영하라』라는 책에서 긍정적 사고계의 권위자 스티븐 코비를 인용했다. 빌 하이벨스는 경영 전문가인 피터 드러커 찬미자로, 1995년에는 자기 사무실 바로 밖에 드러커가 기업계에 자문해 보라고 촉구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적은 포스터를 걸어 두었다. ‘우리의 사업 영역은 무엇인가?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고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목사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기독교 성향의 ‘교회 성장’ 컨설턴트들도 많이 있다. 실제로 주차장 문제부터 이벤트 관리까지 온갖 주제에 관해 목사들에게 자문을 주는 일이 소규모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새들백이나 윌로크리크 같은 초대형 교회는 교회 성장 컨설팅을 부수적 사업으로 진행하면서 훈련 세미나, 웹사이트, 소규모 교회 목사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초대형 교회에서 세속적 영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로버트 슐러는 예배에 유명 인사를 즐겨 초청하는데, 이름난 동기 유발 강연자들과 암웨이 CEO도 포함되어 있다. “기업들은 우리가 미래를 내다보고 꿈을 꿀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어느 야심만만한 목사가 『뉴욕 타임스』에 말한 그대로다.(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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