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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기업은(특히 크고 유명한 기업일수록) ‘인성 검사’를 사람을 고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씁니다. 미국은 더한 모양입니다. 모 조사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마이어스 브릭스 검사(MBTI)를 받은 사람이 수백 만 명이며, 포천 100대 기업 가운데 89퍼센트가 화이트칼라 직원을 뽑을 때 이 검사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화이트칼라 구직 현장에 뛰어든 바버라 에런라이크 역시 커리어코치들을 만나며 수많은 인성 검사에 시달렸습니다.

그 결과 유명한 글쟁이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놀랍게도 ‘글을 잘 쓰지 못할 것’이라며 글쓰기 능력을 강화하는 ‘집중적인 저널리즘 워크숍’을 추천받기도 하고,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성향이 ‘바로 자신’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지요. 기업이 그렇게나 ‘인성 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화이트칼라 구직 체험기가 생생하게 녹아 있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완결작 『희망의 배신』을 통해 ‘인성 검사’의 진짜 목적,  그 비밀을 알려드립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WEPSS 검사는 200개 항목의 제시문에 A에서 E까지 등급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제시문은 이를테면 ‘무미건조한, 쾌락 추구, 활력, 중재자, 집념이 강한’ 등이었다. 10분 안에 검사를 해치워 버리자고 마음먹고 주방 탁자에 앉았다.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쉽지 않았다.

‘조화로운’이라는 제시문을 보자. 때로 조화롭다고 해야겠지만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갈등을 회피한다’? 가능하다면 물론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일부러 분쟁을 찾아 나설 때도 있고 책상을 꽝 치는 격한 논쟁을 더없이 즐기는 경우도 있다. ‘강한’과 ‘행복한’은 또 뭔가? 내가 “난 그런 종류의 인간은 아니야.”라고 혼잣말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뿐이었다.

나는 ‘주저하는’, ‘걱정하는’, ‘교정하려는’ 마음을 떨치고 정답처럼 보이는 것,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고르기로 했다. ‘규율이 잡힌’, ‘높은 이상’, ‘독립적’, ‘원칙이 있는’에는 거의 대부분 그렇다고 표시했고 ‘게으른’, ‘미루는’, ‘느긋한’에는 과감히 아니라고 했다.

검사 결과 나온 나의 독창성, 효율성, 선량함, 사랑스러움은 핵심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건강하지 못한(nonresourceful)’ 점이었다.

내 경우에는 사랑스러움과 선량함의 대각선에 딸린 기본적인 결점 이외에도 지나친 예민함, 우울증 및 질투 성향이 ‘건강하지 못한’ 점이었다.

실용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면, 고도로 정서적이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내 인성을 감안할 때(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글을 잘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글쓰기 능력을 강화하는 ‘집중적인 저널리즘 워크숍’ 활동을 권장했다.

 

MBTI의 타당성? 딱 12개 별자리만큼!

마이어스 브릭스 유형 지표(MBTI)는 WEPSS에 비하면 약간 더 정교했다. 내게 해당하는 속성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우회적인 질문들에 답해야 했다. 당신은 (A)상상력이 풍부한 사람과 (B)현실적인 사람 중 어느 쪽과 더 잘 지냅니까?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합리적인 해결책은 그냥 찍는 것밖에 없었다.

당신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입니까? 그야 내가 느낀 감정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용인되는지에 달려 있겠지.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있는 힘껏 한 방 때려 주고 싶은 욕망이라면 당연히 눌러야한다.

외출할 때면 할 일을 계획합니까, 아니면 그냥 나가는 편입니까? 이 역시 경우에 따라 다르다. 법정에 나갈 때와 쇼핑몰에 들를 때는 전혀 다르지 않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모두 써내라는 지시를 받고 타자기 앞에 앉혀진 원숭이처럼 나는 단호하게 미친 듯이 답을 써내려갔다. 그런대로 일관된 인성이 떠오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런 검사 중에서는 마이어스 브릭스 검사가 가장 합리적인 외양을 띠고 있다.

하지만 과학 기자 애니 머피 폴은 2005년에 나온 『인성 검사 숭배』에서 마이어스 브릭스에는 과학적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유형의 타당성은 그렇다 치고 마이어스 브릭스는 그 자체의 기준을 적용해도 예측치(predictive value, 의학 검사에서 신뢰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유병률과 비유병률을 합친 것)가 제로이다.

마이어스 브릭스를 옹호하는 이들의 실험 결과에서도 같은 사람에게 검사를 2번 했을 때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판정된 비율은 47퍼센트였다. 다른 연구에서는 일단 검사를 받은 뒤 몇 주, 몇 년 뒤에 재검사를 받은 사람들의 39~76퍼센트가 유형이 바뀌었다. 심지어 같은 날 검사했는데 시간대에 따라 유형이 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인성 검사’를 중시하는 진짜 이유

경험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인성 검사에 의존해 인간을 몇 개의 ‘인성 유형’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황담즙질이 과다하면 화를 잘 낸다는 식으로 체액이 기분과 건강을 결정한다는 중세 생리학의 ‘체액론’을 연상시킨다. 또 ‘7가지 습관’, ‘4가지 역량’, ‘성공의 64가지 법칙’처럼 범주를 나누고 숫자를 세면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는 수비학적 신앙도 있다. 목록을 만드는 것은 기억력을 높이는 장치이지만 분석 도구는 아니며, 주제가 화학이든 마케팅이든 어떤 세계의 진면모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손익 계산’같은 계량적이고 경험적인 지표에 집착하는 기업들이 무의미한 인성 검사를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성 검사는 기업이 선의, 곧 직원의 고유한 성격을 너그럽게 인정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제스처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을 존중한다는 기치 아래 조직은 ‘적합성’이라는 상투적인 근거를 들어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나쁜 직원, 나쁜 직장은 없다. 둘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남게 된다.

인성 검사의 목적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면, 즉‘ 적합성’이 고용 기준으로 중요하다는 이론에 힘을 실어 주려는 것이라면 업무 수행 능력이나 만족도 예측 지표로서의 정확성은 전혀 필요 없다.

인성검사는 기업이 입사를 거절하거나 해고한 뒤 ‘부적합’하다는 말로 합리화할 수 있도록 예의 바르게 처신하는 방편의 의미가 더 크다. “우리는 개개인에게 딱 맞는 고유한 직무가 있다고 보는데 당신의 경우에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인성의 특성을 나열하자면 경솔하고, 냉소적이고, 허풍스럽고, 역겹고,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던 분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몬태나 뷰트의 광산에서 기업 성층권까지 비상해 다국적기업의 조사 부문 부사장까지 지냈다. 아버지가 인성 검사나 임원 대상 코칭을 받은 적이 있을까?

50년대와 6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했을까? 껄껄껄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 『희망의 배신』 본문 중 발췌 재구성

 


희망의 배신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출판사
부키 | 2012-10-2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하라는 대로 다했다 그런데 '치즈'는 어디에...비싼 돈 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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