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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배신』 편집자 노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 책은 인간과 자연, 아니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므로 그냥 ‘자연’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에 등장하는 수백 종의 동식물들은 처절하게 섭식하고, 기운차게 번식하고, 야멸차게 배신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의 정점에는 ‘생존’이 있다.
생존「명사」
살아 있음. 또는 살아남음.
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오염 / 실종자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다.
애초의 계획은 생존의 정의 다음에 기나긴 ‘드립’과 얼룩말과 사자 이야기, 코끼리와 땃쥐 이야기, 이기적인 황제펭귄과 치명적인 독을 가진 청자고둥,여장하는 붉은뺨도롱뇽과 오징어, 악덕 백만장자 아카시아나무, 너구리회충, 크로이에르심해아귀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내가 이 책을 편집하며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를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존의 정의를 찾다 보니 그럴 수가 없다.
저자의 주장을 잠깐 거스르고 생태계와 인간을 분리했을 때 인간, 특히 나와 우리의 생존 전략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다 보니 쓸 말이 다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생존 전략이 아직 영 신통치 못하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편집 후기는 1장. 탐욕-얼룩말을 죽이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얼룩말이다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다.
본문 44쪽부터
배가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규칙이 있다.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와 아이들이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도망쳐 구명 뗏목에 올라탈 때는 몸집이 크고 강할수록 유리하다. 파편과 다른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된 복도와 계단을 신속하게 통과해야 하고, 어쩌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높은 파도를 헤치고 수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개 남자는 여자와 아이들에 비해 더 강하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남자가 훨씬 유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은 남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구실을 한다.
만약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결하다면, 해양 재난 시 남자는 항상 여자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18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일어난 18건의 해양 재난에 대한 연구에서, 여성의 생존 가능성은 남성에 비해 약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결과는 남성이 여성의 목숨을 구해 줄 때도 있지만 자신을 구하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선원의 생존율은 승객에 비해 더 높다. 선원들은 구명 뗏목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단순히 과거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2011년에 러시아의 불가리아호가 침몰했을 때, 남자는 60퍼센트의 생존율을 보인 반면, 여자의 생존율은 27퍼센트에 불과했다. 2012년에 유람선인 코스타콩코르디아호가 토스카나 해안에서 좌초되었을 때, 선장은 승객들이 탈출하기 훨씬 전에 해안에 도착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타이타닉호는 위 연구에 등장하는 18건의 해양 재난 중에서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을 실제로 따른 단 두 건의 사고 중 하나다. 이 사고에서 여성의 생존율은 70퍼센트였던 반면, 남성의 생존율은 20퍼센트에 불과했다. 타이타닉호를 특별하게 만든 해답은 불세출의 영웅 에드워드 스미스다. 빙산과 충돌한 직후, 스미스 선장은 선원들에게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선원들은 배를 탈출하는 내내 이 명령을 철저히 수행해서, 혼자 살려는 이기적인 남자들의 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했다. 심지어 선원들이 구명정에 먼저 탑승하려던 남자에게 발포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선원들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기적인 남자 승객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10년, 아니 100년이 지나도 뼈아플 생존 실패.
배 안에도, 배 밖에도 우리에게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없다.
정말 웃기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었는데 이번 후기는 그냥 이렇게 쓰고 만다.
정말 웃기고 재미있는 이 책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웃으며 재미나게 살기에는 정말 미안한 4월이니까.
4월 17일. 부키 편집부 지렁이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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