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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브런치』 편집자 노트
철학이 재미없던 철학 전공자, 이제야 비로소 맛을 느끼다
철학과를 다녔다. 하지만 철학이 재미없었다
부키에 와서 맡을 첫 책의 주제가 ‘철학’일 줄은 몰랐다. 뭐 당혹스러울 것까지는 없지만 난감한 느낌. 돌아보면 생각나는 거라고는 ‘소주’와 소주를 둘러싼 ‘반(半)알코올 중독자들’뿐인 대학 시절, 내 전공이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철학 전공을 지원한 까닭은 단순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들른 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을 통해 무언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혹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따위’(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에 지원하는 친구들을 마음껏 비웃어 주며, 당당하게 철학을 1지망으로 선택해 대학에 입성했지만, 뭐 이후의 과정은 참담했다.
노회한 교수들이 몇 년째 우려먹는 강의 내용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고, 막 부임한 젊은 교수는 9개 국어 실력을 자랑하고는 곧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힌두 경전에 도전할 계획이라며 영어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내 속 좁은 마음을 위축시켰다. 게다가 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강의나 전공 서적 내용은 초월이니 존재자니 하는 남의 별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강의실보다는 캠퍼스 잔디밭이나 주변 선술집을 기웃거리며 말 그대로 ‘개똥철학’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철학은 무턱대고 ‘공부’하는 게 아닌 것을…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철학’이라는 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철학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은 결코 교수님들이나 전공 서적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잘못된 방식으로 철학을 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쇼펜하우어나 니체, 그리고 (당시만 해도 젊은 학자였던) 김용옥 등의 글을 읽으며 열광했던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철학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나는 철학을 ‘배워야만 하는 어떤 것’, ‘공부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그 순간부터 난 철학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출판 편집자가 된 뒤, 따로 철학책을 찾아보거나 공부한 적은 없지만 철학을 둘러싼 여러 책들을 편집할 기회는 있었다. 외국 책을 번역한 것도 있었고, 철학을 전공한 한국의 젊은 학자가 집필한 것도 있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느낀 것은 뭐랄까, 젠체하는, 무언가 심오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척하며 읽는 이를 불편하고 낯설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때로 남의 나라 이야기같이 느끼는 나 자신의 열패감 때문일 수도 있었고, 대학 때 나를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화석화된 학문’의 느낌을 또 한 번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제 철학이 재미있다. 그리고 맛있다. 브런치처럼
아… 이게 뭐지? 편집자 노트를 써야 하는데, 좀 이상해졌다. ‘나의 철학 전공 도전 실패기’ 식의 고해성사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그런 내가 이번에 또 ‘운명처럼’ 철학 책 하나를 편집했다. 그런데 이놈… 재미있다. 어려운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이게 정직하겠다.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한다. 철학을 사랑하고, 철학의 고전을 즐겨 읽는 저자의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도 약점보다는 장점으로 다가온다. 정확히 독자의 눈높이에서 철학하기 혹은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자, 출판사 사장, 편집자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제목을 ‘브런치’ 개념으로 설정한 것도, 엄숙한 척하지 말고 즐겁고 가볍게 철학을 즐기자는, 아주 담백한 취지에서였다.(뭐 취지는 담백하지만, 직접 책을 읽다 보면 그 ‘풍성함’에 놀라게 될 것이다.) 철학자들의 이야기 중간 중간에 삽입된 ‘철학 고전 인용문’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철학책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해당 철학책을 구해서 다 읽어 볼까 하는 마음까지 든다.
요 몇 년, ‘인문학 열풍’이 불기는 했지만, 정작 고전 읽기에 도전해 본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갑자기 두툼한 분량의 고전을 맞닥뜨리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철학 브런치』가 제격이다. 철학 고전들에서 정말 흥미로운 대목들만 엄선해 인용했을 뿐 아니라 이를 얼개로 철학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흐름도 굉장히 재미있다. 뭐,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철학 전공자이면서 철학에 재미 붙이지 못했던 내가 이번 책을 진행하며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을 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한번 믿어 보는 건 어떨까?
부키 편집실
걸어가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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