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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를 위대한 과학자들의 대화로 재구성한 『얽힘의 시대』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딱딱한 이론으로 무장한 근엄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확고한 열정을 품은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을 보이며 생생함을 더합니다. 대화로 인해 우리가 살면서 매일 경험하는 세계가 미묘하고 극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얽힘의 시대』는 ‘물리학자들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가 어떻게 양자물리학이 전개되는 방향을 번번이 바꾸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얽힘의 시대』에 등장하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생생한 모습, 그 일부나마 소개해드립니다. <편집자 주>
『얽힘의 시대』에 등장하는 위대한 과학자들
볼프강 파울리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왼쪽 그림은 그레고르 라비노비치가 그린 1930년의 볼프강 파울리, 오른쪽 그림 『얽힘의 시대』 저자 루이자 길더가 그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그걸 정말로 믿니?”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어느 늦여름 오후에 자전거를 곁에 세워 두고 풀밭에 앉아 이렇게 물었다. “원자 내부에 전자 궤도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느냐고?” 그러고선 치즈 한 조각을 베어 문 다음 볼프강 파울리를 쳐다보았다. 파울리는 죽은 듯이 풀밭에 누워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열아홉 살이었다.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보다 1년 반 정도 일찍 태어났을 뿐인데도 이미 뮌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상태였다.
(…)
파울리는 여전히 누운 채 말했다. “아마 모든 게 신화일 뿐일지도 몰라.” 그러고 나서 힘을 잔뜩 주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한낮의 햇볕을 피하느라 눈은 거의 감은 상태였다. 비밀스러운 얼굴이야, 하이젠베르크가 1년 전 파울리를 처음 만났을 때 든 생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는 서로 더할 나위 없이 달라 보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금발에다 빼빼 말랐으며 ‘여느 시골 소년 같은’(스승인 막스 보른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모습이었다. 파울리는 검은 머리카락에다 이미 살이 약간 쪘으며 쉴 새 없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커피숍과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다.
둘을 가깝게 만든 것은 물리학이었다. 이 분야에서 둘은 이미 떠오르는 별이었다.
(…)
“알다시피” 파울리가 말을 이었다. “보어는 원자의 특이한 안정성을 플랑크의 양자 가설과 연관시키는 데는 성공했어. 물론 아직 그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말이야. 보어가 그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 이상, 나는 어떻게 그 두 가지가 연관될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얽힘의 시대』 저자 루이자 길더가 그린 닐스 보어
“요즘 자네 활약이 대단하더군.” 아인슈타인이 보어에게 말한다.
보어는 멋쩍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답한다.
“과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평생 과도한 행복과 절망 사이를 오가고 있다네. (…) 둘 다 알겠지만 (…)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는 희망에 부풀고 뿌듯함을 느끼지만 결국은 발표를 하지 않고 만다네.” 보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양자론이라는 이 끔찍한 불가사의 앞에서 내 견해가 늘 바뀌기 때문이네.”
아인슈타인은 눈을 거의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 벽에 부딪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네. 정말 끔찍하게 어려운 문제지.”
아인슈타인이 다시 눈을 뜬다.
“요즘은 양자론과 씨름하다가 잠시 기분 전환용으로 상대성이론을 다룰 뿐이네.”
에어빈 슈뢰딩거
『얽힘의 시대』 저자 루이자 길더가 그린 에어빈 슈뢰딩거
보어는 말했다.
“ 하지만 슈뢰딩거 박사, 자네도 양자 도약이 일어난다는 걸 인정해야 하네. (…)”
둘은 사흘째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보어가 역에서 슈뢰딩거를 데려온 이후 줄곧 그랬다. 마르그레테와 연구소의 맨 위층에 살고 있던 하이젠베르크의 하루는 이 두 고집불통이 완전히 망쳐 놓았다. 대화와 식사 그리고 산책을 할 때마다 걸핏하면 보어와 슈뢰딩거가 설전을 벌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어는 사람들을 대할 때 아주 사려 깊고 친절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보기에 요즘 그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미치광이 같다. 즉 자신이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둘의 토론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그리고 각자 자기 이론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둘이 하는 말마다 그런 냄새가 물씬 풍겼다.”
(…)
슈뢰딩거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만약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양자 도약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가 양자론에 뛰어든 게 후회막급일 겁니다.”
하이젠베르크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보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손님이 왔는데 바로 앞 침대에서 아파 누워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자네가 한 일을 무척이나 고마워한다네.” 슈뢰딩거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자네의 파동 이론은 수학적 명료성과 단순성에 아주 큰 기여를 했네. 이전의 양자역학 이론들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고말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파울 에렌페스트
1920년경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파울 에렌페스트(원래는 마리케 카메를링 오네스가 그린 수채화로 AIP 에밀리오 세그레 비주얼 아카데미의 허락 하에 책에 실었다)
몇 주 후 에렌페스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바터링 교수 병원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 연구소는 다운증후군에 걸린 열다섯 살 난 그의 아들 바실리를 돌보는 곳이었다. 히틀러는 얼마 전에 “유전적으로 손상된 자손을 금지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첫 활동으로 ‘우수한 인종’을 낳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곧이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장애 아동에 대한 ‘자비로운 죽음’이 시작되었다. 이 일은 의사가 자기 병원에서 행했다.
에렌페스트는 데스크로 가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나는 파울 에렌페스트인데 내 아들 바시크를 만나러 왔습니다.” 늘 부르던 대로 자기 아들의 별명을 댔다. 수납원이 전화를 하고 있을 때 에렌페스트는 나란히 늘어선 똑같은 의자 중 하나에 조용히 앉았다.
간호사가 바시크를 대기실로 데려왔다. 아버지를 보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늦은 9월의 한낮에 둘은 병원에서 걸어 나와 근처 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물리학계의 양심’으로 아끼던 에렌페스트는 권총을 꺼내더니 먼저 아들을 쏘고 이어서 자기를 쏘았다.
나중에 부치지 않은 편지 한 통이 에렌페스트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 날짜는 1933년 8월 14일로 한 달이 약간 넘어 있었다. 보낼 주소는 보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나의 소중한 친구들”로 적혀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삶의 짐을 이끌고 앞으로 몇 달 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네. (…)
자살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서둘지 않고서 평온하게 자네들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그 무렵에 떠올리고 싶네. 내 인생에 참으로 소중했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자네들에게 쓴 이 편지 말일세. (…)
근래에 나는 [물리학의] 발전을 이해하며 따라가기가 더욱 어려워졌네. 애를 써 보아도 더욱 나빠만 지고 엉망진창이 되네.
결국 난 절망 속에서 포기하고 말았네. (…) 그러자 완전히 ‘삶에 지쳤네.’(…)
-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본문 중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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