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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배우기 열풍이 대단합니다. 온 나라가 영어 배우기 열풍에 휘말려 있는데, 영어 사교육비가 전체 교육 예산의 반 가까이 된다는 추정도 나오고, 초·중·고생 해외연수 비용이 수십억 달러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물론 최근 10~20년 사이 세계 각국에서 영어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옛날부터 영어가 중요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것이, 영어 사교육에 돈을 많이 쓰는 것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중학교 들어가서 배우던 알파벳을 지금은 두세 살부터 배웁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영어권 국가의 식민지 역사도 없는데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 국어나 국사까지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어를 공용화한 나라로는 예를 들어 인도를 들 수 있는데, 인도는 영국 식민지였기도 하지만 워낙 다민족 국가라 소위 힌두어 표준말을 공용어로 한다면 지방에서 난리가 납니다. 뭄바이나 다른 남쪽에서는 자기네 말을 쓰겠다고 하니까요. 반면 영어는 어느 지역의 말도 아니니까 쓴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정치적 혹은 역사적 이유가 없는데도 영어 공용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영어 교육 과열’ 양상이죠.
한국의 영어 과열, 비생산적!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영어가 우수한 언어여서가 아니라 현재 영어가 세계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 과열은 굉장히 비생산적입니다. 우선 우리말은 영어와 어족부터 다르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데 굉장히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독일인, 스웨덴인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제가 처음에 영국 가서 TV를 보는데 그 나라는 파업을 잘 안 하니까 스웨덴 탄광이나 조선소에서 오랜만에 파업한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더군요. 그냥 마이크 들이대고 거기 노동자와 인터뷰하는데 저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겁니다. 얼마나 무안합니까? 저도 외국 유학 간다고 토플 공부 열심히 해서 600점 이상 받고 갔는데 ‘야, 어떻게 저렇게 영어를 잘하냐?’ 하며 기가 죽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태생적 한계거든요. 어쩔 수가 없어요. 온 국민이 시간과 돈을 들이는데도 세계적 기준으로 측정하면 우리의 영어 실력이 별로 좋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역사를 다시 써서 우랄알타이어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를 만들기 전에는 우리가 짊어지고 나가야 할 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일부만 영어에 집중해 외국과의 교류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전공 분야에 집중해 실력을 기르는 것이 보다 현명한 일입니다. 물론 자기 전공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면 좋죠. 그런데 둘 다 잘하려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것을 나눠 맡아야 합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개인별로 보면 우리나라보다 영어를 못해요. 그런데 영어권과의 지적 교류는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통·번역사 질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태도도 다릅니다. 제가 일본 통역사와 알게 돼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 기업가들은 자기 영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조건 통역을 쓴다고 합니다. ‘잘 있었냐.’ ‘만나서 반갑다.’ 같은 간단한 대화를 영어로 하다가도 협상이 시작되면 통역을 거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가들은 외국 회사와 사업할 때 실력이 안 되는데도 직접 영어로 대화합니다. 통역을 쓰면 영어 실력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 그게 창피해서 그러는 걸까요? 그러다가 모르겠으면 영어 잘하는 직원 불러내서 협상합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은데, 영어 못하는 건 절대 창피한 게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엔에 가서 영어로 연설했는데, 국가 원수는 자기 나라 말로 해야 합니다. 영어 몇 마디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영국에서 교수 하는 나도 영어는 원어민처럼 못한다
이렇게 보면 영어 과열 현상이라는 것도 앞서 언급한 이공계 기피 현상과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개인 이익과 사회 이익 간의 괴리가 있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영어 잘하면 전공 분야에 대한 실력이 떨어져도 출세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영어를 배우는 거죠.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는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가며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정부가 나서서 입시에서 영어 비중을 과감하게 줄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통·번역사 양성을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업들도 일본처럼 영어 잘한다고 승진 혜택을 주는 관행을 버려야 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영어 잘하니까 저런 말 하는 거 아냐. 만날 사다리 걷어차기 어쩌고 하면서, 지가 또 사다리 걷어차기 하는 것 아냐. 다른 사람들 못 올라오게.”라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국제 학계에서 조금 인정받는 것이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거든요. 제가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내용에 그래도 들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까지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 갔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꿈꾸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하지 못합니다. 글은 조금 쓰지만 말하는 건 제가 들어도 창피합니다. 그런데 저는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를 배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영어를 잘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전공 공부해서 자기 실력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런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국제 교류가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우리나라같이 지적 주도권이 없는 나라 입장에서는 그런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영미권 나라의 지식을 완벽하게 흡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영국에 유학 갔던 거고요. 그 과정에서 영어가 중요한 건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영어도 그럭저럭, 전공도 그럭저럭…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결국 국제 경쟁에서의 승부는 영어 능력이 아니라 언어 속에 담긴 내용에서 나는 겁니다. 일본이 영어를 잘해서 경제 대국이 됐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우습게 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소득 수준이 일본의 3분의 1입니다. 어떤 지표를 봐도 분야에 따라 짧게는 20~40년 우리가 일본에 뒤떨어집니다. 그 나라가 영어 잘해서 잘살게 된 게 아니거든요.
영어 하는 사람과 그에 담을 내용을 연구하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분업해야 우리의 역량이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전략은 온 국민이 영어도 그럭저럭 잘하고, 자기 전공도 그럭저럭 잘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국제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영어 하는 사람은 확실하게 영어 잘하고, 전공 공부하는 사람은 피땀 흘려서 전공 공부에 매진해야 합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영어 하는 사람들이 밤낮 없이 전공 공부하는데, 그것도 몇백 년 앞서 그런 지식을 쌓아 놓은 토대 위에서 하는데, 그걸 우리가 영어 공부에 엄청나게 시간 쓰고, 또 전공 공부도 하고 하는 식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개인과 사회의 이익이 괴리되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과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현상인데,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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