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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명의 의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다양한 의사의 세계
<의사가 말하는 의사>
김선 외 20인 지음
<이 책의 내용은>
의사는 검사, 판사,
변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자 돌림 직업이다. 그 중 의사는 변호사와 함께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직군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의대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전국의 의과대학은 학생들이 혹은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 중 하나이며, 최근 의학대학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의학대학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 의대의 인기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은 경기 침체 및 조기 퇴직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잘나가는 대기업에 입사해도 더 이상 미래를 보장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의대는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졸업만 하면 탄탄한 지위와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의사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 의사들은 정말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일까, 병원은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일까? 『의사가 말하는 의사』의 필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사들에게도 호시절이 있었으나 분명 과거일 뿐 의사의 수입은 앞으로 더 줄어들 가능성이 있으며, 개인병원의 폐업율도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의사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인 윤택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의사’라는 직업을 경제적인 안정과 높은 사회적인 지위로만 판단해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의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골프를 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여느 아빠들처럼 맞벌이를 하면서 딸의 등교를 챙겨야 하고, 전셋집에 살며 오래된 소형차를 몰고 다니는 평범한 생활인이 대부분이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개원의이건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전문의이건 대부분 그렇다. 그들이 특별히 돈에 대해 관심이 없다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보통 의사들이 그렇단다. 이러한 의사들의 항변은 의사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의식한 측면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의사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즉 의사를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들이 생명을 경시하고 돈만 알고 윤리 의식이 낮다고 비난한다. 즉 내가 혹은 내 자식이, 내 친척이 의사가 되는 것은 든든해 하지만 내가 환자로서 만나는 의사들에 대해서는 냉정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이 책의 필자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일반인과 의사, 환자와 의사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의사에 대한 환상 깨기를 시도한다.
이 책에는 다양한 모습의 의사들이 등장한다. 대학 병원, 중소 병원, 개인 병원, 공공 의료 기관에서 원장, 과장, 레지던트, 인턴, 공중보건의사 등 다양한 신분으로 일하는 의사들이 그들의 일과 생활, 애환과 고충, 보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 결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는 있지만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실수를 환자에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도, 소명의식으로 환자를 대하지만 환자의 태도에 따라 자신의 진료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새벽잠을 설치면서 수술했는데 아침에 칭찬은커녕 혼자 수술 먼저 했다고 혼나고 의기소침해 하는 의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사실 의사는 ‘의사’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너무나 다른 전문 분야의 일을 가지고 있다. 병원에서 진료하는 의사만 따져 봐도 그렇다. 내과나 소아과처럼 약물로만 치료하는 의사도 있고 일반외과나 정형외과 비뇨기과처럼 수술만 하는 의사도 있다. 가정의학과 의사처럼 사람의 모든 건강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안과 의사처럼 눈의 건강에만 관심을 쏟는 의사도 있다. 또 이 책에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의사들도 등장한다. 의료 현장을 떠나 메스가 아닌 펜으로 더 큰 환부를 치료하고자 하는 의료 전문 기자도 있고 전문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반 의사로서 섬 진료에 매진한 의사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의사의 세계를 각 분야의 의사들이 가감 없이 전해 주는 것이 바로 『의사가 말하는 의사』이다.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의사의 이미지와 다르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적어도 돈은 많이 벌 줄 알았는데 전문의가 되어도 개업을 해도 생각보다 돈을 못 번다고 하니 의아할 것이고, 의사라면 생명을 존중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는데 알고 보니 평범하고 범속하다고 실망할 수도 있다. 생각과는 다른 현실을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기획 의도이자 목적이기도 하다.
이 책의 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의사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일 뿐 결코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다만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생명을 다룬다는 책임감이 커지며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고.
이 책은 그들끼리 고립된 섬이 아니라 사람들과, 환자들과 호흡하며 함께 세상을 살아가려는 의사들의 진솔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따라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일러주는 데 손색이 없다.
<이 책의 지은이 소개>
이 책을 엮은 곳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는 1987년 호헌철폐를 외치며 사회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의사들을 중심으로 국민과 함께 하며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양심 있는 의료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창립되었다. 인의협은 창립 이후 소외된 계층을 위한 진료 활동뿐 아니라 국민건강권 향상을 위한 제도 개혁 및 다양한 의료 정책 사업들을 수행해 왔으며, 현재 노숙자진료사업, 삼도(섬)의료지원사업, 북한어린이의약품지원사업, 지역의료네트워크, 외국인노동자진료사업, 인권사업, 건강정보사업, 의료개혁 및 정책사업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총 20명으로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한 의사도 아니고, 줄 서서 진료를 기다려야 하는 명의도 아니다.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리 주변의 이웃이자 생활인으로 의사로서의 소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의 필자는 다음과 같다.
김선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
황석민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
전경훈 일산 백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오경현 서산시 공중보건의사
송관욱 내과 전문의(개원의)
김현숙 원진녹색병원 소아과 전문의
윤지성 마리아병원 진료과장
박인근 순천의료원 외과 과장 및 진료 부장
김주연 가정의학과 전문의(개원의)
하정구 서울 백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백남순 경기도 포천의료원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김진국 대한적십자사 대구병원 신경과 과장
곽일훈 부천 프러스안과 원장
김승열 동인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겸 영동응급의료정보센터 소장
이정우 포천 중문의대 구미차병원 비뇨기과 과장 겸 조교수
배경렬 전남대학교 병원 정신과 전공의
박태훈 녹색병원지역건강센터 소장
김양중 한겨레신문 의료 전문 기자
이동호 대전성모병원 외과 저문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편집홍보국
(이상 원고 게재 순)
<이 책의 본문 맛보기>
임상 실습을 하기 위해 처음 병원에 들어갈 때는 나도 왠지 의사가 된 것 같고 가운 입은 모습에 스스로 감탄하기도 하고 이젠 뭘 해도 다 할 것 같지만 실습생은 실습생일 뿐이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이제 PK(병원에서 임상 실습생을 부르는 말), 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며 험난한 병원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알아보자.
어리버리한 PK가 병원에서 가장 많이, 가장 오래하는 건 다름 아닌 관찰(observation)이다. 말 그대로 교수님과 전공의 선생님이 진료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는 거다.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니까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경우도 없다. 자신이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결국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관찰은 실습 기간 중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이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병원 생활은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의미 있는 관찰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관찰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병동 입원 환자들의 회진을 들 수 있다. 회진은 보통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있는데 인턴, 레지던트, 교수님 거기에 실습생들까지 흰 가운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거의 군대 수준이다. 회진할 때 PK는 거의 끝에 따라가기 때문에 많은 의료진이 있는 과에서는 환자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정말 앞 사람 등만 보고 나오기도 한다.
외래 참관을 하기도 한다. 외래 참관은 말 그대로 교수님이 외래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실제 진료하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에 진찰 방법, 환자와의 관계 형성 등 다양한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수술이라는 힘든 관찰도 있다. 외과 계열의 과를 실습할 때에는 수술 참관을 하게 된다. 물론 간단한 수술도 있지만 대학 병원에서 행해지는 수술은 대부분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수술방에 한번 들어가면 보통 몇 시간은 기본이다. 긴 수술에 참관하다 보면 왜 외과 의사들이 체력이 좋아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수술방에 들어가면 실습생들은 의료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벽 쪽에 서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 특히 수술방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오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의료진은 물론 수술 도구까지 모두 철저하게 소독한 채로 있기에 평범한 모든 것, 예를 들어 나의 몸도 오염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혹시나 잘못해서 수술에 참가하는 선생님들에게 옷깃이라도 스쳤다 하면 그날은 엄청 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외과 선생님들은 다혈질이 많으므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수술방에서는 관찰뿐 아니라 수술 보조를 서기도 한다.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기구 붙잡고 있기, 거즈로 피 닦기, 피 흡입하기, 봉합시 실 자르기 등 정말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수술방에서는 행동 하나하나 조심해야 하므로 아직 적응이 덜 된 실습 초기에는 땀 삐질삐질 흘리며 손 떨어 가며 초긴장 상태로 힘들게 수술에 참가하게 된다.
실습생이라고 매일 관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에 한해서 의사 선생님의 지도 아래 실제 의료적 처치를 해 보기도 한다. 물론 실습생은 의사가 아니므로 의료 행위를 함부로 할 수도 없고 환자 역시 실습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 병원은 병원인 동시에 교육 기관이고 실습생 역시 실제로 해 봐야 실력 있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실습 중 해 보는 대표적인 수기(手技)로는 동맥혈 채취, 피부 소독, 피부 봉합, 도뇨법, 비위관 삽입, 심폐소생술, 기관 내 삽관 등이 있다. 이런 수기들을 처음 할 때는 대부분 실패하게 된다. (우선 나를 거쳐 간 수많은 환자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수기 실습은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스스로 찾아서 하려고 애써야 하며 때로는 운도 필요하다. 그래서 실습을 할 때는 강의실에서 스스로 뭐든 배우고 해 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p30~32. 임상 의학 수련 과정 - 의대생, 병원에서 길을 잃다 중)
1년차 선생이 불러주었던 번호를 입력하자 모니터 화면에는 가문 논바닥처럼 이리저리 갈라지고 부서진 뼈 엑스레이가 뜬다.
이런….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간다. 다른 데 다치지는 않았나? 상처는 얼마나 될까? 골절 분류는 뭘까? 병원에 입원할 병실은 있을까? 오늘 위 연차 당직 선생님이 누구지? 당장 수술해야 하나? 어떤 수술을 하지? 환자는 집이 이 근처인가?
담배 하나 꺼내 들고 골절학 책을 펼쳤다. Tibia Fracture(경골 골절)라…. 수없이 봐 왔던 책이지만 매번 새롭다. 이미 여러 번 읽어서 형형색색의 줄이 그어져 있는 책을 또 들여다보면서 나의 ‘내공 없음’주1을 한탄한다.
그래도 영어책을 들고 내려가야 아래 연차에게 위신이 서겠지 하는 생각에 Rockwood(골절학 교과서 이름)를 들고 당직실을 나서서 응급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간호사실에서는 한바탕 일을 마친 밤 근무 간호사들이 야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한 간호사가 응급실로 향하는 내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와 말을 건넨다.
“선생님, 응급실 가세요? 입원 환자 있어요?”
간호사들에게도 야심한 밤에 입원하는 환자가 달가울 리가 없다. 나는 약간 힘든 표정을 지으며 한숨 섞인 어조로 말한다.
“네, 5명 단체 교통사고인데 전부 입원할 것 같아요.”
간호사의 일그러지는 표정에서 알량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농담이에요.”
“선생님!!!!”
간호사의 원망을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응급실 문 앞에는 술에 취한 채 머리가 깨진 사람과 그를 데려온 또 다른 취객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고 바깥 주차장에는 뒷문도 닫지 않은 119 구조 차량과 사건을 확인하러 온 경찰차의 경고등이 번쩍거린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신음을 내뱉으며 누워 있는 중년의 사내가 보인다. 다리에 감은 붕대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1년차 선생(1년차 레지던트)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환자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잠을 한숨도 못 잤는지 초점 없는 눈은 퀭하고 반쯤 걷어 올린 소매 가운에는 환자의 피가 묻어 있다.
“환자분! 다리 말고 아픈 데는 없어요?”
“몰라요. 다리가 아파요.”
“잘 생각해 보세요. 허리는 안 아파요? 어깨나 팔은 어때요?”
“몰라요. 다 아파요. 빨리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주로 밤에 술에 취해 응급실로 오는 환자와는 대화조차 힘들다. 환자의 말만 믿다가는 정작 아픈 부위가 어딘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손상 받은[受傷] 부위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다른 데는 괜찮아?”
1년차 선생에게 물었다.
“네, 어깨가 조금 아프다고 하는데 엑스레이 상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허리는 엑스레이 찍었어?”
“네, 별 이상 없어 보이는데….”
말꼬리를 흐린다. 아마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렵게 환자 몸을 돌려 허리를 두드려 본다.
“아프지 않으세요?”
“네, 괜찮아요… 다리만 아파요… 빨리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오른쪽 다리의 상처를 보기로 했다. 소독약과 거즈, 붕대, 생리식염수 등을 잔뜩 가져다 놓고 피범벅이 된 붕대를 풀었다. 가로 3센티, 세로 7센티 정도 크기의 상처 부위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우측 경골이 바깥으로 삐져 나와 있었고 주변에는 작은 뼛조각들도 보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주변의 보호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말한다.
“환자분! 많이 다치셨어요. 수술하셔야겠어요. 일단 상처 소독부터 할 테니깐 조금 아파도 참으세요…. 여기 진통제 좀 주세요.”
간호사가 진통제 주사를 놓는 동안, 3년차 선생님에게 전화로 ‘노티’주2 했더니 금방 내려온다고 하신다.
1년차 선생과 인턴 선생은 환자의 상처 부위에 생리식염수를 들이 부으며 상처 소독을 하고 있다. 1리터들이 식염수 통 5개를 부을 때쯤 3년차 선생님이 응급실로 들어온다.
“open fracture type 2(개방성 골절 제2형)입니다. 다른 내과적 질환은 없다고 하고요, 마지막으로 음식을 드신 게 새벽 2시경이라고 합니다. drunken입니다.”
수술을 지금 해야 할 것인지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해도 좋은 건지 판단해야 한다. 큰 동맥 등이 다쳤거나 신경을 다친 것으로 의심된다면 지체 없이 수술을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친 후 8시간 이내에만 수술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개방성 골절일 경우 수술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3년차 선생님이 당직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내게 말한다.
“아침에 첫 수술 할 테니 마취과에 이야기해 둬. 수술 기구 주문해 놓고.”
“네.”
1년차 선생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결정이 나면 잠자기는 틀린 것이기에 1년차로서는 어떻게든 아침에 수술을 하게 되는 상황이 좋은 것이다. 3년차 선생님이 응급실을 떠나고, 나는 아침에 수술하는 데 더 필요한 것이 없나 이것저것 챙긴 후 다시 당직실로 돌아왔다. 시간은 3시 40분. 매일 아침마다 있는 X-ray 컨퍼런스 자리에서 이 환자에 대해서 발표해야 한다. 아까 보았던 Rockwood 책을 다시 뒤지고 다른 책도 펼쳐 보면서 이 환자의 상태, 치료 계획, 예후 등에 대해 주섬주섬 주워 담고 몸만 빠져나왔던 당직실 침대에 다시 슬그머니 누웠다.
(p122~125 정형외과 - 걷고 뛰게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중)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한참을 망설이다) “저… 뛰거나 기침할 때… 오줌이 나와요.”
“많이 힘드셨겠군요. 장거리 여행할 때 불안하시죠? 또 운동할 때 패드를 차야 되니까 자꾸 운동도 기피하게 되고… 우울증도 생기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정말 그래요. 남편한테 이야기하기도 힘들고….”
“그럼 요실금 유발 검사부터 해 봅시다.”
처음에는 말문을 열기 힘들어 하던 사람들도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다 보면 봇물 터지듯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어디에도 말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어려움을 보상 받고 싶어서일까. 얼마 전에 내원한 환자는 무척 소심하고 부끄럼이 많아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다시 내원했다. 수술 결과에 너무나 만족하여 삶에 활력이 생겼다며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데리고 왔노라고 이야기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를 알아보았다. 고개도 제대로 못 들던 소심한 환자와 삶의 활력을 찾아 훨씬 밝고 당당한 태도의 그녀, 너무나 많이 달라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이처럼 여성 요실금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은근히 소문이 나고, 환자가 다른 환자를 소개하기도 한다. “얘, 너도 빨리 수술해. 그 선생님… 진짜 실력도 있고 좋아. 빨리 수술해서 너도 나랑 같이 조깅하러 가자.” 이럴 때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사실 요실금 문제는 다루면 다룰수록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 땅에 요실금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요실금에 대한 나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여성이 요실금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으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면 이 나라의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p188~189 비뇨기과 - 어디에도 말 못하는 고통을 어루만지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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