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때 : 『약탈적 금융 사회』편집자 노트
오렌지마멀레이드는 부키 편집자 중에 『약탈적 금융 사회』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빚도 전혀 없고, 신용카드는 딱 한 장, 그것도 교통카드로만 사용하고, 불필요한 지출도 하지 않고 심지어 매월 일정액을 꼬박꼬박 저축하는... 그야말로 '빚 없는 자유인'입니다.
그런 오렌지마멀레이드조차 『약탈적 금융 사회』편집을 하면서 이 현실이 너무나 엄청나 교통카드로 쓰고 있던 단 한 장의 신용카드 대신 충전용 교통카드로 바꾸었다고 하는군요.
『약탈적 금융 사회』를 편집하면서 느꼈던 그의 이야기, 오렌지마멀레이드의 편집자 노트 소개합니다.(이 책 끝나면 오렌지마멀레이드는지리산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하고 각종 예약을 마쳤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와 체력을 소비해서 바로 어제, 휴가지를 바꾸었답니다. 『약탈적 금융 사회』는 오렌지마멀레이드의 에너지와 체력을 제대로 '약탈'해간 셈입니다.) <편집자 주>
[편집자 노트] 약탈적 금융 사회 나와 당신,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때
지금 당신의 지갑에는 신용카드가 몇 장이나 있나요?
직장인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지갑에 신용카드 서너 장쯤은 갖고 있으리라. 주유 할인 받는 카드, 커피 전문점과 영화관에서 할인 받는 카드, 해외에서 쓸 수 있는 글로벌 카드, 그리고 요즘에는 여기에 체크카드도 한두 장쯤 더해졌을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활동인구 1인당 발급 받은 신용카드 수는 무려 4.6매에 달한다. 이 놀라운 수치에 걸맞게 많은 직장인이 돈이 궁할 때면 손쉽게 신용카드를 찾는다.최근 어느 취업 전문 포털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직장인 10명 중 6명이 ‘월급고개’를 겪는다고 답했다.
‘월급고개’란 예전 보릿고개처럼, 지난 달 받은 월급은 바닥이 나고 아직 이번 달 월급은 받지 않은 때를 일컫는 신조어다.
우리 부키의 경우 월급날이 매월 말일인데 다음달 20~25일쯤 되면 통장 잔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때가 바로 월급고개인 셈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월급고개를 신용카드로 넘는단다. 6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응답했고, 현금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12퍼센트나 됐다. 그나마 비상금을 쓴다는 22퍼센트의 사람은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 남은 신용카드, 이걸 잘라버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는 신용카드에 얼마나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약탈적 금융 사회』에는 신용카드로 인해 헤어날 수 없는 빚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히 담겨 있다.
처음에 사정이 어려울 때는 카드로 긁고 나중에 결제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제날이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이자율이 높은 현금서비스를 받게 된다. 사정이 더 어려워지면 다른 카드로 돌려막다가 카드 대출로 이어진다. 까다로운 절차나 심사 없이 전화만 하면 대출을 해 주니 신용카드가 구세주 같다.
게다가 신용카드사는 어찌 그리 친절한지. 현금서비스를 이용하시라, 새로운 카드를 발급해 드릴 테니 그걸로 리볼빙을 하시라 등등 어려울 때마다 내 편이 돼 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미끼에 불과하다.
당신을 또 한 명의 빚의 노예를 만드는 미끼 말이다.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어느 20대 여성이 택시비 4000원을 결제하려고 카드 9장을 꺼냈는데 전부 한도 초과로 나왔단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조금만 삐끗하면 신용카드에서 바로 사채로 이어진다.
나도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 딱 한 장,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교통카드 용도로만 써 왔다.
그런데 『약탈적 금융 사회』를 작업하는 동안 그 신용카드마저 사용을 중단했다. 대신 매번 일정액을 충전하는 교통카드를 샀다. 이전에는 내 돈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이제는 충전할 때마다 실제로 돈이 나가는 걸 눈으로 보게 되니 소비에 대한 경각심이 확실히 더 생긴다.
그런데 아직 카드를 잘라 버리지는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혹시나 급하게 돈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
혹시나 해외에 나가게 되지 않을까.
혹시나 뭔가 혜택을 받을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나처럼 ‘보수’적인 소비자마저 이렇게 주저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말 안 해도 알 만하다.
하우스 푸어, 언제까지 ‘푸어’하게 지내시렵니까
물론 신용카드는 문제의 일면이다.
『약탈적 금융 사회』는 이처럼 지금껏 우리가 의식조차 못하고 지냈던 금융의 ‘약탈’을 하나하나 일러 준다.
제2금융권인 보험사, 증권사, 저축은행은 물론 제1금융권이라는 은행도 우리의 ‘피눈물’로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당장 내 주변만 봐도 마흔 전후의 가장은 대부분 하우스 푸어다.
대출이자를 감당 못해 집을 팔려고 해도 거래가 끊겨 한마디로 ‘살(生) 수도, 팔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가계 부채는 나날이 늘어 국가 전체가 위기라고 하는데, 금융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 돈을 되받으려고 담보 회수에 나서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의 ‘약탈’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극한 상황이 닥치자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집단 담보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은행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냈다. 적절한 평가 없이 건설사 말만 믿고 대출해 준 책임은 지지 않고 모든 걸 채무자에게 떠넘기는 은행의 행태에 반발한 것이다. 또 CD 금리 담합 의혹에 대해서도 이미 집단 소송이 제기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금융권과 기득권 세력의 지배 논리에 갇혀 너무 고분고분하게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그저 열심히 일해 월급 받고, 신용카드 쓰라면 쓰고, 집 사라면 사고, 갚으라면 갚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해 온 내 행동을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감시하지 않으면 금융의 약탈적 행태는 계속될 거라는 사실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분명히 지금의 가계 부채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지혜를 찾아낼 것이다.
그때쯤이면 더 이상 금융에 속지 않고, 금융 역시 우리를 속이지 않는 건강한 사회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거기에 『약탈적 금융 사회』가 큰 몫을 하리라 생각한다.
2012년 9월 12일
지금쯤 배낭을 꾸리고 있으려나? 부키 기획편집부 오렌지마멀레이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