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목수정의 초경 : 조물주는 여자를 대충 설계했구나
<마이 리틀 레드북>에 감탄하며 추천사를 쓴 작가 목수정의 초경
<편집자주>
한겨레21 안인용 기자가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기획했습니다.(한겨레21 기획 기사 바로 가기 ) 전 세계 100명의 솔직한 초경 이야기를 모은 <마이 리틀 레드북>을 소개하며 한국 여성 4인의 초경담을 실었는데요,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 중 <마이 리틀 레드북>에 감탄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추천사를 쓴 작가 목수정의 초경담을 본인의 허락을 얻고 소개해드립니다.
조물주는 완전 여자를 대충 설계했구나!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방에 쪼그리고 앉아 물감을 뿌리며 방학 숙제로 낼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문득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게 느껴졌다. 치마 아래로 쳐다보니,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종이를 물들은 물감처럼, 거무스럼해진 피가 얼룩덜룩한 그림을 팬티에 그려놓은 것. "아, 올 게 왔구나."
바로 화장실로 가지 않고, 태평스럽게 계속 그림을 그리며 초경을 맞는 내 감정을 살폈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불쑥 다가와 속옷을 적셔놓은 초경에 대해 좋은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소변처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팬티를 완전히 적셔버린 상황을 접하며 들던 첫 생각은, '조물주는 완전 여자를 대충 설계했구나!'.
<소녀생활>이던가, 아빠가 매달 사오셨던 청소년 잡지에 있던 '어머, 어쩌면 좋아'라는 상담 코너에서 초경을 치르는 소녀들의 경험담을 수없이 보았기에, 당황하진 않았다. 최대한 늦게 시작되기를 바랐을 뿐. 두 살 연상의 언니가 월경을 하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를 정도로, 집에서 월경에 대한 대화는 금기였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야 화장실에 가서 끔찍한 상태에 처한 팬티를 찬찬히 보았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말없이 생리대를 건네셨다. 혼나지도 그 어떤 격려를 받지도 못했다. 그저 입 다물 일이었을 뿐이다. 다음날 학교에서 한 친구에게 생리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뜻밖에도 그 아이가 내게 "축하해"라고 말했다. 여드름이 많던 옥경이의 축하가 야릇한 울림이 되어 내 안에 퍼졌다. 유일하게 내 초경을 장식해준 한 송이의 꽃이었다.
그리고 16년 뒤, 홀로 파리의 작은 다락방에서 새 삶을 꾸미며,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 마시던 커피 필터에서, 난 내 초경의 풍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 몽글몽글 엉겨붙은 커피 알갱이, 하얀 필터를 물들이던 커피가 그려놓은 무늬는 내 초경의 팬티 모습과도 같았다. 모든 것에서 해방된 그 시절, 난 초경을 다시 따뜻하게 떠올렸고, 마술처럼, 그것은 여자로서의 내게 건네는 친근한 화해의 시작이었다.
마이 리틀 레드북(my little red book)
- 저자
- 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 지음
- 출판사
- 부키(주) | 2011-05-27 출간
- 카테고리
- 시/에세이
- 책소개
- 남자에게는 물론 여자들끼리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초경 이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