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로 배우는 금융상식 3 - 오즈의 마법사에 숨은 '은본위제'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로 배우는 금융상식 3
<오즈의 마법사>에 숨은 '은본위제'
편집자 주
이찬근 교수의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는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돼 있는 금융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금융의 종합 개설서’입니다. 현실 문제나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시작해 이론과 제도를 접목하고, 하나의 금융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관련 학문 체계를 결합해 설명하는 통섭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또 금융을 가치중립적으로 다루는데 머물지 않고 금융과 관련한 사회적 논쟁점도 두루 다루어서 실생활에서 폭넓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금융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께도, 금융 전문가나 종사자들에게도 유용한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에는 알아두면 좋을 금융상식도 매우 풍부한데요, 그 중 몇 가지를 시리즈로 다루고자 합니다.
영화와 뮤지컬로 우리에게 익숙한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프랭크 바움의 소설, 1900년) 아시죠? 도로시라는 캔자스에 사는 소녀가 회오리바람에 의해 오즈라는 도시로 실려가 겁쟁이 사자, 양철나무꾼, 허수아비 등을 만나고 기상천외한 일을 겪다가 오즈의 마법사가 아닌 ‘은구두’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은으로 만든 구두였을까요? ‘금 구두’나 ‘다이아몬드 구두’가 비싸고 귀하기로 치면 더 하고, ‘유리구두’나 ‘빨강구두’도 있는데 말이죠.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에는 이 소설이 쓰인 1900년을 전후한 ‘금본위제’ 미국 사회가 통화량 부족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며 이 소설에서 은에 신통력을 부여한 것은 은을 통화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시의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호,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 『오즈의 마법사』에 그렇게 깊은 뜻이? 소개해드립니다.
『오즈의 마법사』로 살펴본 19세기 말 미국의 통화 정책
1880~1896년에 미국 물가는 무려 23%나 하락했다. 경기가 침체되어 물건 값이 하락하는 디플레이션(‘디플레’)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농업국이었으므로 농민의 타격이 컸다. 특히 중서부 농민들은 동부의 대형 은행으로부터 부채를 끌어다 쓰고 있었는데, 디플레 현상으로 농가의 수입은 주는데 부채는 줄지 않았으므로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렇게 농가 사정이 날로 악화하는 반면, 은행은 점점 부를 키워 날로 비대해졌으므로 사회적 불만이 비등했다.
그러자 민중주의를 표방하는 농촌 지역 정치인들이 은화의 자유 주조를 허용하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금본위제하의 미국은 금의 공급량에 의해 통화량이 결정되고 물가 수준도 정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금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디플레가 발생했다. 농촌의 민중주의자들은 금화 외에 은화를 사용하게 되면 저절로 통화량이 늘고 물가 수준도 정상적으로 올라가 농민의 채무 상환 부담이 줄어들리라 내다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금과 은을 모두 인정하는 양본위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1890년대 미국 정치의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것이 최대 쟁점이었고 민중주의 노선을 따르던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인간을 금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된다.”라고 외치며 금본위제를 성토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민중주의자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미국은 금본위제를 고수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후 통화량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어 디플레가 인플레로 바뀌면서 농민의 사정이 다소 좋아졌다. 1898년 캐나다 클론다이크강 유역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금이 대량으로 공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오즈의 마법사』에는 19세기 말 미국의 통화 정책과 관련한 알레고리가 들어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는 노란 벽돌 길은 금을,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은 디플레를 상징하며, 도로시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 주는 은구두는 은을 상징한다. 따라서 『오즈의 마법사』는 양본위제로 디플레를 타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 외에도 도로시는 보통 사람, 허수아비는 농민, 양철 나무꾼은 노동자, 겁쟁이 사자는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은행가들에게 저항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를 상징한다. (위 그림은 은구두를 신은 도로시가 노란 벽돌 길 위에서 겁쟁이 사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오즈의 마법사』 초판에 실려 있다.)
이러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통화량이 적게 공급되면 마치 구속복(strait jacket)을 입은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아 경제 활동이 위축된다. 반대로 통화량이 과도하게 공급되면 인플레가 발생해 경제 안정이 훼손된다. 이처럼 통화량의 적절한 공급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중앙은행의 핵심 기능은 통화량의 공급과 조절이다. 즉 중앙은행이 역사적으로 태동한 것은 정부의 은행 또는 은행의 은행이라는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통화 제도가 금은에 근거하지 않는 관리 통화 제도로 이행하면서 통화량의 조절이 중앙은행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로 자리 잡게 되었다.(p.9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