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 - 과잉보호는 진보를 막는다 : 동물의 진화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6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
동물의 진화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여섯번째. 캥거루
“과잉보호는 진보를 막는다”
캥거루는 동물 중에서 모성애의 상징입니다.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키우니까요. 어미 캥거루 배 즈음에 새끼 캥거루가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 편 부럽기도 합니다.
캥거루는 태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임신 기간이 짧아요. 자궁에 수태된 태아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어서 빨리 출산하는 거죠. 이렇게 태어난 캥거루의 새끼는 겨우 콩알 정도의 크기라고 하니, 사람으로 치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 조산아인 셈이죠. 그래서 캥거루는 이 미성숙한 태아를 온전한 태아로 자랄 때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키우는 것입니다.
자식을 주머니에 넣고 키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캥거루의 생존전략은 무엇일까요?
최형선 선생은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를 통해 지극히 자식을 감싸는 모성애가 바로 생존전략이자 지금 캥거루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계라고 진단합니다.
캥거루에 대해 좀 더 살펴볼까요.
캥거루는 불완전한 태아를 안전하게 길러내기 위해 주머니에서 새끼를 키워왔고, 이 전략은 새끼를 잃지 않게 도와주었습니다. 생존의 주요한 목적 중에 ‘번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친 환경에 새끼를 팽개쳐두는 것보다는 어미가 새끼가 온전히 독립할 때까지 거두는 것이 훨씬 훌륭한 전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캥거루의 이런 모성이 꼭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캥거루 새끼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의존성이 강한데 이는 어미의 과보호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합니다. 어미는 주머니에 넣어서 키워 준 것도 모자라 다 큰 새끼의 응석까지 고스란히 받아주는데 이런 과잉보호가 자식의 앞날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주머니에 들어가기 좋게 발달한 캥거루의 몸 형태도 살아가는 데는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토끼 등 완전 태반포유류들의 대부분이 네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반면, 유대류인 캥거리는 뒷다리 두 개를 한꺼번에 써서 뛰어오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갖가지 환경에서 훨씬 자유롭게 살아가는 태반포유류와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캥거루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캥거루는 어미 주머니 속의 편안한 삶에 길들여지다 보니 모험을 감행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새끼 보호’가 어느 순간 ‘과잉보호’가 되자 그것이 곧 진보를 가로막는 족쇄가 된 것이죠.
사람도 그렇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물질이 풍요로워질수록 틀에 박힌 생각과 태도로 살아서는 경쟁력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캥거루 어미처럼 틀에 갇힌 사랑을 쏟는 것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맞서 홀로 서는 법도 가르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지요.
혹시 여러분이 부모라면 공부만 잘하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 거나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대신 해주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세요. 혹시 여러분이 누구의 자식이라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세요. 신문지면에 ‘캥커루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것이 내 이야기는 아닌지 말이지요.
캥거루의 모성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이 또한 캥거루 이야기의 일부일 뿐입니다. 지금도 캥거루는 지구 한 곳에 굳건히 살아있습니다. 캥거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전략에 대한 무릎 치는 이야기가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에 있습니다. 캥거루가 당신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까요? 지금 캥거루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