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선택 - [주역계사 강의] 맛보기
출판사마다 새 책이 나오면 온라인 서점을 통해 미리보기나 본문 발췌분을 제공합니다. 당연히 독자들에게 이 책의 고갱이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어서지요.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백 마디 편집자의 설명보다는 단 한 문장, 책의 내용이 더 힘을 가질 때가 있으니까요.
적게는 200쪽 내외 많게는 600쪽이 넘는 책 내용 중에 어떤 부분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너무 길게 인용할 수도 없고, 너무 어려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소위 독자를 '낚기만' 하는, 책의 아주 작은 부분이서도 안 되니까요.
남회근 선생의 <주역계사 강의>는 펼치는 부분 부분이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야기라, 편집자가 이를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더 좋은지 어떤 것이 더 좋을지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달랐습니다. 아마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 자신이 고민하는 것,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더 마음 가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분량의 제약이 있어 온라인 서점 정보 등재에도 언론사 기자들을 위한 보도자료에도 다 못 쓰고 말았습니다만,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까워 소개합니다.
편집자는 <주역계사 강의>에서 아래 글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움직이는 글은 무엇인가요.
<주역계사 강의> 맛보기
- 문학 속에는 철학이 있습니다. 이 생각을 한번 활용해 보십시오. 어떤 상황이라도 좋습니다. 사회든 정치든 어떤 방면이든 거기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이럴 때는 독서를 하십시오. 『역경』이나 사서오경을 읽어 보십시오!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무료하거나 침울할 때, 또는 졸릴 때는 역사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투지와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강한 날에는 경서를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사서를 읽으라고 한 것입니다. 강유(剛柔)의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37쪽)
- “물이군분”은 다양한 종들이 각기 다른 사회를 이룬다는 것으로, 이로부터 “吉凶生矣”, 길흉이 생겨납니다. 어떤 유의 인간이든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되면 곧 문제가 생깁니다. 의견이 달라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역경』을 읽고 난 뒤에는 천하의 어지러운 분쟁이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이군분으로 인해 이견이 생기며, 이견은 분쟁을 유발시키고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길흉이 생깁니다. 이렇게 본다면 길흉이란 종에 따라 각기 다른 사회를 형성한 후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40쪽)
- 『역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요? 변화의 원칙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주에는 변하지 않는 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변하지 않는 사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시각각 모든 공간에서 변합니다. 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늘에는 천체의 현상이, 땅에는 구체적인 형질이 나타남으로써 그 사이에서 변화가 드러난다고 한 것입니다.(41쪽)
- 곤이란 무엇일까요? 곤은 물질세계의 모든 작용을 대표합니다. 그 작용은 매우 간단하여 우리는 공자가 말한 위의 두 구절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제일 깊은 학문이 제일 평범하며, 제일 평범해야만 비로소 제일 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이 높고도 깊으며 또 공경스럽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섬기는 부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이지 원래의 부처가 아니라고요.(52쪽)
- 길흉이란 인위적인 가정으로서 인간의 마음이 이득과 손실에 대해 반응하는 일종의 심리 현상입니다. 그래서 “吉凶者, 失得之象”, 즉 길흉은 득실의 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 천지간에는 절대적인 길흉은 없으며 절대적인 옳고 그름도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이것은 형이상적 측면에서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심리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연애를 하면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는 아주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길한 것만은 아닙니다. 표면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겠지만 실의와 절망의 감정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좋겠지만 이별할 때는 무척 괴로울 것입니다. (61-62쪽)
- 천지인 삼극이 한 번 움직이면 곧 육효가 됩니다. (…) 구심력이 있으면 원심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역경』을 읽고 나면 저는 매우 두려워집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충심으로 대하고 우리 또한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다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었을 때는 충심도 소용없습니다. 구심력이 있으면 원심력도 있으니까요. 저는 늘 말하곤 합니다.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믿을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운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변합니다. 인문 사상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68쪽)
- 좋은 사람도 어떤 때는 아주 나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평상시에 너무 좋았기 때문에 오히려 원래 나쁜 사람보다도 훨씬 더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도리어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습니다. 아무리 설득해 바꾸어 보려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원래 나쁜 사람보다도 훨씬 더 곤란하지요.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차라리 소인은 쓸 수 있어도 군자인 척하는 자는 쓰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군자인 척하는 자보다는 소인이 오히려 다루기가 쉽지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은 어린애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얼른 판별해 내듯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의 말과 행위 속에서 판별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195쪽)
- “子曰, 祐者助也, 天之所助者順也.” 이것이 바로 공자의 종교 철학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신의 가호를 바랍니다. 그러나 공자는 말합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부처나 신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 번 꿇어앉아 절을 한다고 도와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해 줄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가호를 비니 하나님인들 오죽 바쁘겠습니까? 한 장소에서 재판을 하는 원고와 피고가 모두 하나님을 찾으니 하나님인들 어떡하겠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보살이나 신에게 빌면서 돈은 쥐꼬리만큼 내고 바라기는 엄청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삼천 원쯤 들여 바나나나 초를 사서 상을 차려 놓고 부자가 되도록 해 달라, 승진이 되도록 해 달라, 무사하도록 해 달라며 별의별 것을 다 원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수월하게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358쪽)
- 『역경』을 배우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상으로써 살펴 효사로써 가지고 놀기 위해서이지 점을 치거나 산명(算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입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자기가 처한 그날의 운세는 자신이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기상(觀其象)’입니다. (71쪽)
- 천하의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좋은 일도, 절대적으로 나쁜 일도 없습니다. 만약 좋다고 생각한다면 곧 골칫거리가 생깁니다. 인생은 회(悔)입니다. 회란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무구(无咎)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기를 바란다면 과오를 잘 씻어야 합니다. 수시로 자신을 반성하여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잘못한 것, 자신의 허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습니다.(81쪽)
- 여러분은 미신을 믿을 필요도 없지만 불신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신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현대인들은 걸핏하면 미신이라고 비난하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 저는 그가 정말 잘 알고 있는지 묻곤 합니다.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다른 사람의 말만 믿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인 것입니다. 과학뿐 아니라 철학이나 종교도 미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107쪽)
- 동양 문화에서는 생사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서양은 어떨까요? 서양은 아주 심각한 문제로 삼습니다. 종교도 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종교란 인간의 사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종교는 죽음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동양 문화는 죽음보다는 삶을 부각시킵니다. 삶은 다함이 없다〔生生不已〕고 생각하지요. (110쪽)
- 불교를 달리 사문(沙門)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대에는 이를 상문(桑門)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면서 진정한 출가자, 즉 출가자 중의 출가자라 할 수 있는 수행자를 두타행(頭陀行)이라 했습니다. 고행승인 셈이죠. 계율에 따르면 두타는 뽕나무 밑에서 사흘을 묵어서는 안 됩니다〔頭陀不三宿空桑〕. 두타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나무 밑에서 밤을 새고 좌선을 하면서 사흘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흘째 되는 날은 반드시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그곳에 대한 감정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미련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컵이라도 자주 사용하면 감정이 생깁니다. 실수로 깨뜨리기라도 하면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물건에 대해서도 일종의 미련의 감정이 있습니다. (118쪽)
- 왜 인간은 처음엔 본성이 선하다고 할까요? 선이란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왜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악을 제거하고 선을 지키려 할까요? 선이란 일음일양의 균형을 완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음일양이란 곧 일선일악입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악이 있으면 반드시 선이 있게 마련입니다. 옳은 것이 있으면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것이 있습니다. 천지간의 선악시비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모두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도덕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시점에서 도덕적인 것이 시기나 장소가 바뀌면 도덕적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악시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인위적인 것입니다. (129-130쪽)
- 천지는 나쁜 사람을 낳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도 낳습니다. 대지는 독초를 기르기도 하지만 약초 또한 기릅니다. 좋고 나쁜 데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평등하게 사랑을 베풉니다. 비는 독초든 약초든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적셔 줍니다.
성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를 얻은 사람은 시대를 걱정하고, 세상을 걱정하며, 하늘을 슬퍼하며, 사람을 근심합니다. 그렇지만 천지의 도는 만물을 고취시키되 성인처럼 시대를 슬퍼하거나 나라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도는 최고의 도덕이요, 최고의 사업입니다. 천지는 만물을 길러 인간에게 제공하지만 인간이 천지에게 주는 것은 더러운 쓰레기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천지는 한 번도 성을 내는 적이 없습니다. 천지는 이처럼 위대합니다. (147-148쪽)
- 여러분이 사업을 한다고 합시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이사진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칠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 각자가 자기 몫을 챙기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이사뿐 아니라 직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들어온 신입사원은 자기를 채용해 준 데 대해 몹시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조금 더 지나면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제기랄, 회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시피 했는데 이따위 대우가 말이나 돼!” 하면서 원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단계들입니다.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