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람들은 왜 장하준을 불편해 하는가?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람들은 왜 장하준을 불편해 하는가?
사람들은 왜 장하준을 불편해 하는가? 사람들은 왜 장하준을 불편해 하는가? 낯설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우리가 아는 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경제학의 세계는 이론의 세계이고, 모델의 세계이고, 계량화된 세계이다. 그곳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없다. 모든 것이 일관되고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다.
완전 경쟁 시장을 생각해 보라. 한계 비용이니 한계 수익이니 균형이니 하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다만 완전 경쟁 시장에서는 누구나가 참여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무한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에 따라 그 결과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완전 경쟁 시장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 무역을 생각해 보라. 리카도가 비교 우위 이론을 발표한 이래 자신이 상대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제품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보다 다양한 상품을 보다 많이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약간은 복잡한 계산을 거치기만 하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투자에 대해서도, 지적재산권 보호 문제에 대해서도, 공기업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성적으로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경제학적 논리가 정연하게 재연된다. 투자가 늘면 생산이 늘고, 생산이 늘면 소득이 늘어난다. 따라서 투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 지적재산권 보호는 발명과 발견에 대한 인센티브이다. 이 인센티브를 통해 각자의 성공 욕구를 부추겨 발견과 발명을 촉진할 수 있다. 공기업에서는 누구도 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기 것처럼 알뜰살뜰 운영하려 하지 않는다. 공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되는 근본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론 대신 현실을! 모델 대신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경제학의 세계는 이렇듯 잘 정돈되어 있다. 하지만 장하준이 보여 주는 경제학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그곳에서는 이론 대신에 현실이, 모델 대신에 갖가지 사실들이, 계량화된 수학적 세계 대신에 모순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적 세계가 펼쳐진다.
자유 무역이 누구에게나 유익하다고? 장하준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자유 무역이라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브라질 축구 국가 대표팀과 열한 살 먹은 그의 딸 유나의 친구들로 구성된 축구팀과의 경기나 다름없고, 좀 순화시켜 표현해도 중량급인 무하마드 알리가 경량급 선수권을 네 개나 보유한 파나마의 로베르토 듀란과 시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 수준이 다르고, 기술 수준이 다르고, 자본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카도의 비교 우위 이론이 틀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리카도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단지 그 이론이 내포하는 범위 안에서만 말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정확히 말해 각 나라들이 ‘자신의 현재 기술 수준을 그대로 감수하는 한에서는’ 자신이 비교적 잘 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가 보다 고도의 기술을 획득해 다른 나라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들을 하고자 할 때, 가령 쌀 대신에 자동차를 수출하려 할 때는 리카도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리카도의 이론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감수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닌 셈이다.
지적재산권 문제는 또 어떤가? 흔히 지적재산권 보호 제도는 발명과 발견을 촉진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선진국이 자국의 산업과 기술을 보호할 목적으로 입안된 것이 지적재산권 보호 제도였다.
이런 지나간 일이야 그런가 보다 하자. 하지만 아무리 ‘특허 폭발’이라 해도 그렇지, 도대체 (신선하지 않은) ‘빵을 신선하게 하는 법’과 (다섯 살 먹은 어린이가 발명했다고 하는) ‘그네 타는 법’ 같은 것에 특허라니….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진 상처를 낫게 하는 강황의 효능이 이제 와서 미국에서 특허로 인정하려 하다니…. 마치 과거 구미 각국이 행했던 지적재산권 도용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듯하지 않은가.
게다가 현행 지적재산권 보호 제도는 인류의 진보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세기 초까지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118개 국가, 1억 24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달리는 비타민A 결핍증을 해결할 수 있는) 베타카로틴을 함유한 ‘황금쌀’을 만들 수 있는 유전공학 기술의 개발자들이 이 기술을 실용화하는 데 필요한 관련 특허 70여 개에 대한 협상을 진행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기술을 다국적기업에 판 것을 보면 그렇다. 특허 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지금 거대 자본이 아니면 특허의 실용화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본말의 전도인가? 사실의 왜곡인가? 장하준은 이런 식으로 경제학의 주요 현안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1장과 2장에서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해 흔히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못되었거나 부분적인 진실에 불과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 그는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이른바 정통적인 지혜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뒤집기 위해 본격적으로 경제 이론과 역사, 당대의 증거들을 혼합한 논의를 전개한다.
3장에서는 자유 무역이 과연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4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이 실제로 외국인 투자의 증대를 가져 오는지를, 5장에서는 공기업의 문제가 민영화로 진정 해결될 수 있는지를, 6장에서는 지적재산권 보호 제도가 현실에서 발명과 발견을 촉진하고 있는지를, 7장에서는 작은 정부가 정말로 만병통치약인지를, 8장에서는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정권이라는 이유로 도움의 손길을 철회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9장에서는 경제 발전에 적합한 민족성 내지는 문화라는 게 실재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장하준에 따르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외국 회사들이 자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외국 회사들을 더 돕는 길일 수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회사들 가운데는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회사들도 상당수 있으며, ‘생산성이 높은 외국’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빌리는 것’은 경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장하준은 또 안정된 물가와 신중한 정부 재정 정책이 경제 발전에 해가 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란 시장이 지나치게 작아서가 아니라 시장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는 타고난 짝이 아니며, 국민들이 게을러서 나라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가난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게으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세계 경제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입장과는 정반대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가?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자들이 틀렸다고 단언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 이론의 정당화를 위해 사실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부정부패 문제를 보자. 부패가 심한 나라에서 제대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적어도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 온 상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장하준에 따르면 이런 신자유주의적 교육에 기반한 상식은 사실과 배치된다.
부정부패와 민족성과 경제 발전 장하준은 일례로 똑같이 부패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자이레와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인도네시아의 경우를 지적한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선진국들 대부분이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에 성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공개적인 공직 매매가 흔한 관행이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19세기 초 이전까지만 해도 각료들이 개인적인 수익을 올리기 위해 관할 부문의 자금을 ‘차용’하는 것이 정당한 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19세기 초 여당의 충성파들에게 공직이 분배되는 ‘엽관(獵官)’ 제도가 확립된 이래 남북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 뒤까지 그런 관행이 만연했다. 1883년 펜들턴 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는 미국 연방 관료들 가운데 공개적이고 경쟁적인 과정을 거쳐 임명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바로 이때가 미국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은 경제 성장을 보였던 시기이다.
이런 사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하준에 따르면 부정부패나 비민주적 정권은 희생양일 뿐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부정부패를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 사학자이자 문화 이론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랜디스는 “문화가 모든 차이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제적 성공은 “일본인들이 (…) 효율적인 정부라는 전통적 미덕과 낮은 문맹률, 긴밀한 가족 유대, 직업윤리, 자기 절제, 민족적 일체감과 타고난 우수성에 대한 인식 등 근대화를 이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신보수주의 정치 평론가 후쿠야마는 독일을 본질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사회로 분류하면서 독일의 경제 발전을 당연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100여 년 전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독일인들과 일본인들은 희망이 없는 부류였다. 일본인들은 게으르고, 독일인들은 도둑질을 잘하는 그런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이 어떻게 경제를 발전시켰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올바른’ 가치 체계를 가진 국가들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얽매여 독일이나 일본의 연속적인 경제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의 역사 자체를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때 인도의 느린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던 힌두교 문화 - 심지어 과거에는 ‘힌두교 식 성장률’이라는 표현까지 널리 쓰였다 - 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인도의 성장을 돕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책들도 곧 등장할 것이다. 또 장하준이 프롤로그에서 상상한 것처럼 2060년대에 모잠비크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그 다음에는 모잠비크 문화가 얼마나 경제 발전에 적합한 문화를 가졌는지를 논하는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대안이 없다고? 이런 장하준의 주장에 대해 이른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들은 체도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론보다는 현실을, 모델보다는 사실을 중시하는 경제 관료나 기업인들마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말처럼 장하준의 주장이 이미 지난 시대의 것이기 때문인가? 국제 환경과 시장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뀐 지금에 와서는 1980년대 마거릿 대처가 했던 말 그대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인가?
하지만 시대가 과연 바뀌기는 했는가? 외국인 투자 문제를 보자. 신자유주의자들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가 이미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초국적기업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을 빼는 방식’으로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는 나라들에게 본때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어째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를 제한하는 국제 협정에 개발도상국들이 빠짐없이 서명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정통파는 시장 논리를 좋아하니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의 여부는 개발도상국에게 맡겨 두면 되지 않는가?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호적인 나라에 대해서만 투자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해당 개발도상국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주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부자 나라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이런 제한을 부과하기 위해 국제 협정에 의지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규제가 효력이 없다는 이들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시대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달리 대안이 없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대안이 없다는 당신들의 대안은 과연 무엇이냐고? 개방된 시장에서 공정하게 벌이는 무한 경쟁의 결과로 형성된 균형(equilibrium)이 대안이냐고? 아니면 그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바로 그 상황이 대안이냐고?
뜨거운 가슴은 어디로 갔는가? 유감스럽지만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둘 다 대안이 될 수 없다. 시장에서 이루어진 균형 자체를 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완전 경쟁 시장이 성립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 무수히 겪지 않았던가. 어떤 산업이건 시작 단계에서는 수십, 수백의 업체가 겨루지만 어느 정도 안정될 때쯤이면 몇 개 업체가 시장을 과점하게 되는 것을. 그 과점 시장이 대안인가? 만일 그렇다면 저 위대한 ‘시장 이론’은 모두 폐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대안이 지배적인 사회라면 사회 자체의 존속도 어렵다. 생각해 보라. 이런 사회에서 승자에게는 모든 것이 돌아간다. 그렇다면 패자에게는? 과거처럼 운이 따르지 않아서라든가, 시대를 잘못 만나서라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단지 순화시켜 말하면 ‘경쟁력 부족’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무능’이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질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극화가 해소될 수 있을까?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가 안정될 수 있을까? 구태여 답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역사에서 숱하게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
장하준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현실화된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장하준의 기록은 숙연하다.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주는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탐욕스럽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는, 그 일로 커다란 물질적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악한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순응주의자가 되는 편이 훨씬 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신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될 텐데, 굳이 무엇 하러 먼 길을 돌아다니며 ‘불편한 진실’을 찾아다니겠는가? 부정부패와 게으름, 혹은 국민들의 방탕함 탓으로 돌리면 쉬운데, 굳이 무엇 하러 가난한 나라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신경 쓰겠는가? ‘공식적인’ 역사가 자국은 늘 (자유무역, 독창성, 민주주의, 신중함 등) 모든 미덕의 원산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무엇 하러 자국의 역사를 점검하겠다고 가던 길에서 벗어나겠는가?
내가 희망이 있다고 말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마리아인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다 균형 잡힌 그림이 제시되면 기꺼이 언행을 바꿀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바로 그런 그림을 제시하고 싶었다. 이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2장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60년 전인 1947년 6월) 마셜 플랜이 발표된 뒤부터 1970년대 신자유주의가 융성하기 전까지 미국에게 인도되던 부자 나라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부자 나라들이 과거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은 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 역사적인 사건은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통틀어 개발도상국 세계는 가장 높은 성과를 올렸다. 그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다.
그렇다. 장하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간 잊고 있던, 아니 잊고자 했던 뜨거운 가슴을 되새기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장하준이 불편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