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솔직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마이 시크릿 닥터』 편집자 노트
이렇게 솔직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아니! 내 흑역사가 왜 여기 있지!!!
-배가 봉긋한 예비 엄마들이 남편 손을 꼭 잡고 육아 잡지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구석에 홀로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려 본 적이 있는가?
-의사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굴욕의자’에 누워 있다가 변변한 질문 하나 던지지 못하고 진료실을 나온 적은?
-간호사에게 “의료보험 적용하시겠어요?” 라는 말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리지?’ 했던 기억은?
부끄럽지만 이건 모두 내 이야기다. 3년 전 겨울, 나는 잊을 만하면 재발하는 질염 때문에 생고생을 하다가 여성 카페를 뒤져 회사에서 가까운 유명 산부인과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은 엄마가 될(혹은 되고 싶은) 여성들의 파라다이스였다. ‘시집도 안가고 뭘 했나’ 하는 열패감까지 얻은 나는 도저히 다음 진료를 받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집에서 멀지만 친절하다고 소문난 ‘미혼여성’ 전문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은 진료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젊은 여성들과 그녀들을 위한 상술로 만원이었다.
친절하다고 소문난(알고 보니 병원 광고 파닥파닥) 병원에서 30분 대기해서 2분 진료 받고 다시 1시간 동안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을 잊을 수 없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사무적인 눈빛과 이런저런 비싼 검사 권유, 왜 이런 시련이 닥친 건지 묻지 못한 내 소심함에 속상했다. 여자 나이 서른부터는 ‘아줌마 호르몬’이 분비되어 어디서도 수준급의 뻔뻔함을 구사할 수 있다고 믿는 나였지만, ‘굴욕의자’에만 앉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은 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붉은 능금처럼 탐스러운 어른 책을 만들겠어!
이 책에는 ‘섹스’가 290번, ‘오르가슴’이 184번 등장한다. 므흣한가? 나 역시 ‘야한 책’을 맡았다며 흥분(반 난감 반)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는 각종 의학용어와 씨름해야 했고, 가끔은 콧등이 시큰해져 비염인 척 코를 풀며 눈물을 닦았다. 그 외에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며 교정을 본 것이 대부분이었다.(원고를 보는 내내 ‘ㅠㅠ’ 와 ‘ㅋㅋㅋ’를 넣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정보와 재미, 감동이 버무려진 원고에 빠져들수록 어른이 아니라 청소년에게,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몸을 사랑해 줄 남자에게 이 책을 보여주고 싶었다.
편집 기간 동안 어느 자리에서나 책 이야기(섹스, 질, 오르가슴, 성기 피어싱 이야기)를 하는 통에 ‘음란마귀’가 씌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말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감춰야 하고, 부끄럽고, 민망한 것이 아니라 서른 넷. 남은 내 인생의 행복을 판가름 할 결정적인 주제였다. 게다가 친구들이 모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포도 알 크기의 투명하고 찐득한 젤리 같은 것이 나올 때가 있다. 꼭 해파리 같이 생겼는데 그게 뭔가?
해파리 같은 게 눈에 띄는 건 아마 배란기(대개 생리 첫날로부터 14일 뒤) 때일 것이다. 배란기에는 자궁경부 점액이 싱싱한 달걀흰자처럼 맑고 끈끈하게 바뀌는 데 물을 충분히 마시지 않아 가벼운 탈수 상태인 경우 그 농도가 더 짙어진다.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다. 만약 임신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런 분비물은 행동에 돌입하라는 신호다! 반대로 임신을 피하려 한다면 임신 가능 시기를 알리는 해파리 분비물이 나왔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본문 중)
내겐 10년간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나는 두 달간 해파리를 보지 못했다!)
편집자가 아니라 여자로서 별 다섯 개!
책을 마치며 정말 좋은 ‘친구’를 얻은 기분이다. 나도 안다. 저자에게 ‘친구’라는 수사가 식상 하다는 걸. 하지만 정말 그렇다. 친구가 아닌 그냥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절대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 미혼인 내가 심지어 임신, 출산, 폐경 이야기에도 어찌 그리 공감을 했는지, 왜 남자 독자가 주치의를 리사로 바꾸고 싶다고 했는지 여러분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자랑을 시작한 김에 하나만 더 하자면, 민망한 그림이 잔뜩 실린 카마수트라부터 중년 여성을 위한 건강서까지 본의 아니게 많은 참고도서를 본 독자 입장에서도 이 책이 가장 재미있었다! (불끈이와 소중이, 존슨과 샐리의 오르가자미 낚시 성공기도 물론 있다!)
나도 안다. 편집자는 때론 거짓말을 한다는 걸. 하지만 정말 그렇다. 단언컨대, 이 책만큼 우리의 몸을 생각해 주는 재미있고 친절한 책은 본 적이 없다.
편집자가 아닌 여자로서 리사에게 고맙다. 그리고 리사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제 점수는요. 별 다섯 개!
지렁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