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신도 '정신적 과잉 활동인'?
어쩌면 당신, 정신적 과잉 활동인!
대다수의 사람은 사용 가능한 감각 정보의 취사선택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정보는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이렇게 뇌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 덕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적 과잉 활동인에게서는 이 과정이 자동화되지 못하고 일종의 ‘수작업’처럼 이루어진다.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뒷전으로 밀어낼 것인지 하나하나 결정한다는 말이다. 이 같은 수작업 등급 판별은 쉽지 않다. 이들은 대개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선택하기를 어려워한다.
그 점은 감각들의 선별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정말로 힘든 것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극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극들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이 과민한 사람들은 허구한 날 밤낮도 없이 감각 정보의 홍수에 파묻힌 채 피곤해한다. 이들이 차라리 생각을 멈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어휴, 신경 좀 쓰지 마!”
자기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걸로 괜찮으니까 자신에게 자명한 것이 남들에게도 자명한 줄 안다. 보통 사람들은 정신적 과잉 활동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예를 들어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자동차 소음, 줄지어 지나가는 행인, 쇼윈도의 상품에 신경이 분산된다. 이렇게 주의가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지기 때문에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넬리는 저녁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에 흐르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식당 내 떠들썩한 소음,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도 들렸고, 종업원들이 오갈 때마다 나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음식 냄새,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들의 움직임, 강렬한 조명을 지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에 집중하고 모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기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이러고도 모임을 즐겁게 마칠 수 있다면 그게 더 대단하다고 하겠다.
오감은 우리가 삶을 접하는 통로다. 감각이 과민하다는 것은 그만큼 더 넘치게 살아간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이미지, 감미로운 소리, 황홀한 쾌감, 좋은 향과 맛과 같은 기분 좋은 정보들로 감각을 가득 채우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언제라도 생을 만끽할 준비, 지저귀는 새소리와 석양에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순간에 그들의 차이는 더 이로운 것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이 경이로운 느낌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하면 벽에 부딪힌다.
“응, 좋네. 노을이 졌구나. 그런데 해 넘어가는 거 한두 번 봐? 자, 그만 가자!”
상대는 기껏해야 이렇게 대답하든가, 아니면 아예 조롱을 할 것이다.
“짹짹! 작은 새들이 울어요! 야, 네가 몇 살인데 그런 걸 들여다보고 앉았냐?”
하지만 이러한 감각 과민증은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 우울증의 위기를 여러 차례 겪은 후에도 잠재적이지만 강력하게 삶의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각이 과민한 사람은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만 하면 언제라도 되살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