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키 books 2013~/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낼 수 있기를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8. 28. 14:04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디자이너 노트

 

아직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화면 위에 첫 번째로 무언가를 올려 놓기 전, 나는 종종 ‘(이번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하곤 한다. 고딕 계열 서체를 사용하지 않을 것, 중앙 정렬을 사용하지 않을 것, 빨간색 계열 색상을 사용하지 말 것, ……. 개중에는 끝까지 지켜지지 않는 것들도 많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 때때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해도 되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단서가 되곤 한다. 물론,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에서 내가 정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실 등 생활 공간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 마감과 달리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행동이었다.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저자 최광현의 전작 가족의 두 얼굴.

나름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오는 거실 옆 복도를 묘사한 『가족의 두 얼굴』과 너무 비슷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도 그렇지 않은가? 이번 주의 작품은 지난 주에 그렸던 그림과 다르면서도 더 나은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가족의 두 얼굴』 표지에는 빛 바랜 액자들이 걸려 있는 거실 옆 복도가 그려져 있다. 따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드는, 사람들이 지나다녀야 하는 곳인데도 인기척이 없는 공간의 이미지는 지금 나를 둘러싼 불안,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는 희망을 동시에 나타낸다…… 고, 당신이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는 가족에서 여성으로 시선을 옮긴 만큼, 디자인 역시 좀더 단호한 태도를 보여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따뜻한 녹색은 쿨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런 시안들은 모두 통과되지 못했다.

▲ (체감하기로는) 백 개쯤 만든 것 같은 시안들 중 일부.

생각해 보면 가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야말로 ‘공간’으로 은유할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혼자만의 방, 흔히 욕실이나 화장실의 거울을 바라보며 여자들은 남자들과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서로 공유한다.

남자들에게 화장실은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화장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화장을 고치며 더 나은 자신(아니, 어쩌면 자신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 자신)이 되는, 처음 만난 옆의 그녀에게 말을 거는, 그리고 용무가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더 머물다가 바깥에서 기다리며 지루해하는 그가 더 견디기 힘들 때에야 아무렇지 않은 듯 겨우 떠나는 공간이다.

남자들에게 화장실은 문이 닫힌 방이다(소변기들 사이에 파티션조차 없을 때에도 그렇다!). 그러나 여자들에게 화장실은 남자들이 없는 광장이다.

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한 시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조금 더 컬러풀한 이미지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조금 수정했다. 그것이 이 책의 표지가 되었다.

 

▲ 마지막 시안들. 두 번째 시안으로 결정되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들과도 다른 무언가를, 심지어 내가 이전에 만들어낸 것들과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욕망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러지 않았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종종 그렇다.

나는 『가족의 두 얼굴』 때와 마찬가지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잊은 채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원고를 읽었다. 원고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수많은 상담 사례 속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종종 ‘문제의 해결’도 아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상대방이 나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이었다.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서로 다른 우리들은 이렇게 간단한 것 같은 해결책이 있음에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하고 의기양양하게 시작해도 실패하곤 한다. 내가 처음에 설정한 제한-즉,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듯, 남녀 사이의 수많은 문제들 역시 옳다고 생각했던 해결책이 사실은 전혀 엉뚱한 것일 수 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때 대수롭지 않게 고른 선택지가 다른 선택들을 거쳐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온 것일 수 있다. 이제 그때로 돌아갔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때의 나도 그런 마음으로, 통과되지 못한 시안들을 한 데 모은 파일을 저장한 뒤 새 파일을 열었다. 지금까지 낭비한 시간이 아깝겠지만, 그렇지만 지금 다시 시작하면 앞으로 더 낭비해야 했을 시간은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 출간된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앞으로의 선택 역시 당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데려가게 될지 모르지만,

럴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부키 디자인팀 지구인

 


나는 남자를 버리고 싶다

저자
최광현 지음
출판사
부키 | 2013-08-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가족의 두 얼굴]로 5만 독자를 위로한 최광현 교수, 상처받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