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머릿속 작업실에도 스위치가 찰칵!
세상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디자이너 노트: 주식시장의 17가지 미신
어떤 원고들은 제목, 부제, 키워드 몇 개만으로도 머릿속의 작업실에 스위치를 켠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의 작업실이 환하게 밝아지면, 책상 위에는 이미 밑그림을 따라 가위로 오려 둔 그림들이 가로세로 줄을 맞추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도화지 위에 그림들을 이리저리 놓은 뒤 마음에 들면 그대로 풀칠한다. 운이 좋으면 겨우 몇 분만에 작업은 끝난다. 완성!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학부 시절, 혹은 디자이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덤벼들기 일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미지를 겨우 0.1mm 옮기는 것조차 몇 시간이 걸리곤 했다. 아마 당신이 표지 시안 마감 직전 부키 사무실 맨 끝, 내 자리 근처를 들를 일이 있다면, 허겁지겁 모은 참고자료들을 펼쳐 놓은 채 망연자실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 보내는 일이 잦아질수록 무시무시한 의구심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혹시 이제 ( )을/를 할 수 없게 된 걸까?’ ‘디자인’이 쓰여 있어야 할 자리를 왜 비워 놓았느냐고? 당신도 당신의 직업을 괄호 안에 써 넣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 내가 느낀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눈금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눈금을 다 채우고 나면 다시는 그 전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찻물에 넣은 뒤 깜빡 잊어 더 이상 우러나올 것이 없는, 색깔까지 흐릿해진 티백이 된 것 같은 기분의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머릿속 작업실 스위치가 켜졌다. 찰칵― 조금 전까지 어둠 속에 서 있던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표지 시안 모음.
그런데 왜 지금이었을까? 주식시장에 만연한 상식, 그러니까 ‘미신’이 왜 잘못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원고가 그럴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저자 켄 피셔는 미신들을 반론의 여지 없이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깨뜨린다.
예를 들어 보자.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주식이 채권보다 더 안정적인데, 그것을 반대로 착각하는 이유는 “대니얼 카너먼의 전망이론에 따르면 (중략) 인간의 두뇌는 안전 가능성보다 위험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1장, ‘채권은 주식보다 안전하다?’). 100에서 나이를 뺀 숫자가 보유해야 할 주식의 비중이라는 상식은 미신인데, 이런 쉬운 방법의 맹점은 “나이를 기준으로 자산 배분을 하는 것은 (중략) 나이가 같은 사람은 모두 똑같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현재나 미래에 필요한 현금 흐름의 규모, 투자자가 추구하는 목표, 그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자산 성장률 등을 무시한다. 현재 상황과 포트폴리오 규모, 투자자의 은퇴 여부도 무시한다. 투자자 개인의 수많은 세부 사항도 무시한다. 그리고 배우자도 무시한다!”(2장, ‘자산 배분은 나이에 맞춰서 하라?’)
오랫동안 주식시장에 대한 수많은 예측을 적중시키며 실력을 입증한 저자답게, 미신들에 대한 태도는 결코 유보적이지 않다. “~일 것이다” 같은 서술어가 쓰일 법한 곳에서도 “~이다” 같은 서술어가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그런 원고는 흰색, 검은색, 빨간색 등 명징한 색깔만을 사용하는 디자인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
▲ 매대에서 다른 책들과 섞여 있을 때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서 만들어 본 이미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던 시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주식시장의 17가지 미신>의 표지, 본문 디자인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주식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도 영감을 준 책이니, 주식투자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더 큰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뭘 해도 안 되는 구렁텅이에 지금까지 내가 빠져 있었듯 지금 당신도 빠져 있다면(그것이 주식투자든, 디자인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다리자. 기다리다 보면 당신의 머릿속 작업실에도 스위치가 찰칵― 하고 켜질 것이다. 세상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의 작업실 바깥 공간을 꽉 메운 그것을 당신이 아직 갖지 못한 것은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미간을 찡그린 채 깜빡 잊어버린 문의 비밀번호를 맞추다 보면, 문이 열리자마자 그것이 방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 정말 그랬다. 당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오기를.
그리고 다음 작업에서 다시 미궁에 빠진
부키 디자인팀 지구인
이것도 역시 해결될 거예요, 마치 거짓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