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 시리즈/희망의 배신

화이트칼라에게 허락되지 않는 가장 큰 것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4. 11:11

왜 화이트칼라의 위기인가?

혹시 그런 말 들어보셨나요? ‘기술’이 있으면 굶어 죽진 않는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 많이 하던 말입니다. 물론 정작 ‘기술’이 있는 분들은 자식은 ‘기술’ 대신 볼펜으로 밥 먹고 살기를 바라시는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요

‘평생 직장’도 없고 ‘기술자’ 대신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하는 경우도 너무 많고 심지어 ‘고급 기술’을 가진 의사, 변호사, 회계사도 힘들다고 하는 판이니 그야말로 1% 외에는 모두가 아슬아슬한 상황인가 싶기도 하지만요.

탐사 취재, 잠입 취재, 현장에 풍덩 뛰어들기가 주특기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화이트칼라의 고단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그녀는 이전까지 활동가였고 집필가였고 프리랜서 기자였고 작가였으니까요) 자신의 이력을 적당히 세탁해 구직 활동에 나섰다는 건 벌써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 결과물인 『희망의 배신』에서 왜 화이트칼라가 지금 더욱 위기인가에 대해 이렇게 고찰합니다.(물론 노동시장 유연성 심화, 빈번한 정리해고와 다운사이징 등은 기본으로 깔아둔 상태로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편집자 주>

화이트칼라가 뺏긴 가장 큰 것은 ‘존엄성’

 

‘경제 전문직’은 의례적인 명칭일 따름이다. 경영학은 상대적으로 늦게 대학 과정에 포함되었고, 최근 20년간 가장 인기 있는 경영학 석사 학위(MBA)만 해도 경영 관련 일을 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격 요건은 아니다.

경제 전문직 중에서는 회계사가 유일하게 진짜 전문직으로, 필수 교육과정과 자격증이 필요한 직종으로 인식된다. 경영, 인사관리, 마케팅, 홍보 분야에서는 대학 학위만 있으면 예컨대 나 같은 사람도 전문가 후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개방성 탓에 이 분야의 경력자들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고 변덕스러운 해고물결에 맞설 보호 장치도 없다.

화이트칼라들이 갖지 못한 것 중에 일자리의 안정성 이상으로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존엄성이다.

의사는 자신의 기술과 노동을 판매한다. 이런 점에서는 블루칼라나 핑크칼라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다.

트럭에 짐을 부리는 창고 노동자, 다리를 설계하는 엔지니어는 자신의 노동과 임금이 직접 교환된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뉴저지 취업 박람회에서 만난 젊은 임시직 노동자가 한 말처럼 그들은 일거리를 주면 그 일을 한다. 그런데 기술과 노동뿐 아니라 ‘자기자신’까지 판매해야 하는 화이트칼라 직종에는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정장을 빼입은 화이트칼라가 육체노동자를 얕볼지 모르지만 사실은 육체노동자들보다 훨씬 강압적인 심리적 요구에 시달린다.

화이트칼라가 사는 세상은 음모와 정체불명의 기대치, 조작과 심리 게임이 횡행하는 곳이며,

성격과 태도 같은 자기표현이 업무 수행 능력보다 더 중요한 곳이다.

화이트칼라에게 무한 요구되는 일방적인 충성 서약

화이트칼라가 하나로 뭉쳐 일자리와 직업적 자율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흔히 개인주의 탓이라고 한다. 또는 능력주의라는 검증되지 않은 신념을 원인으로 들먹인다. 하지만 의사, 언론인, 심지어 블루칼라도 능력주의 신봉자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화이트칼라가 고립된 채 취약한 상황에 놓인 것은 전면적, 무제한적으로 자신을 고용주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조건 탓이다. 의사나 과학자는 자신을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근무하는 병원이나 실험실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화이트칼라는 현재 ‘임원실’을 차지한 이들에게 완전한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내게 위기관리에 대해 가르친 짐 루카스제프스키가 이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CEO가 바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행위가 불법의 경계선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은 일체의 의문을 제기하지 말고 몸 바쳐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고된 화이트칼라의 수가 보여 주듯 안타깝게도 이런 충성심은 일방적인 것이다.

- 『희망의 배신』 중 발췌 재구성 

 


희망의 배신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출판사
부키 | 2012-10-2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하라는 대로 다했다 그런데 '치즈'는 어디에...비싼 돈 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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